최병관 사진가·시인

 

▲ /사진=최병관

 

 

어머니는 서울 모래내 김해 김씨 가문의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소래포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오봉산 자락 '산뒤마을'에 땅 한 뼘 없는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을 오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의 부잣집 외동딸이 고생보따리를 안고 시집을 오신 셈이다. 그런데다가 아버지는 어머니 나이 마흔 다섯에 일곱 자식을 놔두고 53세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더욱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야밤에 서울로 도망을 가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농한기에는 함지박에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리 건너 '포동'이나 먼 곳은 소래철교를 넘어 수인선 철길 따라 '오이도'까지 걸어가며 물건을 파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불쌍해서 절대로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갈 수 없다는 결심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가끔씩 콧구멍을 솜으로 틀어막아 놓았는데, 빨간 피가 젖어 있었다. 미처 솜으로 막지 못했을 때는 빨간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런 날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치를 채신 어머니는 "나쁜 피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셨다. 그런데 어느 봄날 깡보리밥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허벅지까지 빠지는 논에서 어른들도 힘들다는 논갈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내 코에서도 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때서야 어머니에게 가끔씩 코피가 나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땅에 작은 족적이라도 남기고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선 생존해 계신 어머니의 삶을 찍으면서 한편으로는 한이 서린 고향땅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고향마을을 찍기로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그리고 책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후 새벽부터 11개 마을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나를 동네사람과 친구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형제들마저도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니 생각하지 못했던 호된 시련이 닥쳐왔다. 하지만 어머니만큼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거라, 우물도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말씀을 해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머니 머리가 하얗게 변할수록 물렁한 '홍시'만을 좋아하셨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홍시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실 때 왜 홍시만을 좋아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간호사가 '산소호흡기'를 교체할 때 어머니 치아가 모두 세 개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언젠가 내게 "틀니 하는데 얼마나 들까, 무척 비싸겠지?"라는 말씀만 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고 병원 화장실에 앉아 머리를 쥐어박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고향이 흔적 없이 사라진 지 7년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실크로드'(한울출판사) 포토에세이를 출간해 어머니 묘지 앞에 펼쳐놓고 못난 자식의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

해마다 감 익는 계절이 오면 감을 찾아다니며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다. 감 중에서도 말랑말랑한 홍시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가을이 지나기 전에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다. 우리나라는 휴대폰을 세계에서 제일 잘 만든다는데,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는 휴대폰을 만들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