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10년도 훨씬 이전 얘기다. 방북단 일행이 평양의 한 유명 식당에서 의미없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반주를 위해 테이블 위의 평양소주를 딸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간밤에 북측 안내원 동무들과 폭탄주를 너무 한 탓에 "그냥 밥이나 먹자"가 대세였다. 반주파는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미련을 못 버렸다. 한 인사가 주워 들은 풍월로 "당이 결정하면 나는 한다"고 나섰다. 바로 등 뒤에서 식당 여성 복무원의 지적이 들려왔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가 맞습네다." '헉', 서빙만 하는 게 아니고 다 듣고 있었잖아.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네까?" 지난 9월 평양 정상회담 때 나왔다는 이 한 마디로 시끄럽다. 문제의 오찬장 사진부터 찬찬히 살펴봤다. 우선 식사 분위기가 너무 우중충하다. 내로라 하는 기업 총수 3명과 경제단체장 2명. 한분은 팔순의 재계 원로다. 모두 눈을 냉면 그릇에 박은 채 묵묵히 젓가락질만 하고 있다.
▶이 장면, 어디선가 본 듯하다. 기자 초년병 시절 사회부 저녁 회의는 살벌했다. 악질 데스크의 '큰 기사 꺼리' 닥달 때문이다. 추궁을 받던 심약한 기자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전설도 전해져 있었다. "이 월급 도둑들아", "텅 빈 지면에 아예 니가 올라가라"고 다그쳤다. 분위기 나쁜 날은 회의 후 저녁자리까지 이어졌다. "밥이며 술은 잘도 먹네." 대찬 후배 하나가 한 소리 질러 상황을 종식시켰다. "제발 밥 먹을 때만은 공장 얘기 고만 합시다."
▶'냉면 목구멍'이 좀 너무 하긴 했다. '밥 먹을 때는 X도 안건드린다는데'라는 댓글도 보인다. 하필 기업 총수 한 사람이 냉면 사리를 추가로 주문했을 때 나온 얘기라니 더 고약하다. 누군지 몰라도 그 양반 이제 영영 냉면 끊게 생겼다. '새는 모이를 탐하다 명을 재촉한다'더니 기껏 냉면 사리를 탐하다 험한 꼴 당하다니.
▶야권은 물론, 여권 일부에서도 '그냥 넘어 갈 수 없다'고 나섰다. '버르장 머리 없는' '국민들 자존심도 생각해야' '상소리 중의 상소리' '무례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 다 속좁은 무리들의 단견일 뿐이다. 평화와 통일이 그냥 주어지겠는가. 이만한 일에 발끈한다면 똑 같은 사람이라는 소리나 들을 일이다.
▶그나 저나 '냉면 목구멍 챌린지'는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1980년대의 펩시 챌린지를 본뜬 것인가. 실제로 냉면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 가는지 몸소 체험해 보겠다는 자세.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의 발현이니 크게 흉 볼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