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1939년 발틱 3국의 한 국가인 리투아니아로 수많은 유태인들이 나치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를 떠나 모여들었다.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유럽을 떠나야하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1940년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각국 영사관들을 폐쇄하자 독일을 피해 외국으로 피신하려던 유태인들은 유일하게 남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와 통과비자 발급을 애원했다.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영사관의 영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杉原 千畝, 1900~1986)는 몰려드는 유태인들의 급박함을 보고 본국 정부의 재가를 요청했으나 불가하다는 답신을 받았다. 독일의 리투아니아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서 스기하라 영사는 본국 외무성의 지시를 무시하고 유태인들에게 일본을 경유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영사 스기하라는 유태인들을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대피시키는 소련의 동의를 얻은 후 하루에 20여 시간씩 직접 손으로 비자를 쓰고 직인을 찍었다. 일본 영사관이 폐쇄당할 때까지 두 달 동안 쉬지 않고 비자를 발급했고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열차 내에서도 비자를 만들었으며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자기 서명이 담긴 서류뭉치와 도장을 창밖으로 던져서 유태인들 스스로 비자를 만들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일본 비자를 발급받은 유태인 피난민 6000여명은 무사히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일본을 경유하여 중국이나 미국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비자 한 장으로 가족 전체가 일본을 경유하여 제3국으로 갈 수 있었으며 스기하라의 비자로 생명을 건진 사람들은 4만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들에게 무제한 비자를 발급했던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총영사로 부임했다가 체코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구금되었고 이후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전쟁이 끝난 1947년에 외무성에서 해고되었다. ▶한 사람의 용기와 의리가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던 스기하라의 결단에 이스라엘을 위시하여 세계 여러나라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 훈장과 칭송이 이어졌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정부의 훈령을 어긴 사람이라며 홀대를 받아왔다. 다행히 그가 세상을 떠난지 14년만인 2000년에야 공식 명예회복이 이뤄졌고 그로부터 또 18년 후 지난달에 일본의 쉰들러로 추앙받는 스기하라의 동상이 아이치(愛知)현 즈이료고등학교에 세워졌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스기하라를 추모하는데 78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