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

 

미국 유학 초기 낯선 교외 지역으로 가려고 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손바닥만한 크기로 접힌 고속도로 지도책을 펼쳐 얼굴을 파묻고 지도상에 나와 있는 길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길치이기에 지도를 보는 것에도 멀미를 느낄 만큼 곤혹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을 통해 길 찾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한결 수월해졌던 기억이 있다.

귀국 후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을 들으면서 멀미 나는 지도와 영원히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목적지까지 가장 최단거리를 실시간으로 탐색하면서 운전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의 길 안내 서비스에 익숙해진 탓인지 어떤 길을 통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는 도통 관심조차 두게 되지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도로망에 대한 지식을 꿰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은 이미 스마트폰의 길 안내 서비스 이용으로 없어진 지 오래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를 이른바 '혁신'이라고 한다. 일찍이 슘페터(Schumpeter J)는 기술혁신이란 오래된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변혁을 일으키는 '창조적 파괴' 과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동력으로 해석된다. 혁신적 기술은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높이지만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춰 생산방식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산요소의 결합을 낳는다. 이러한 결합은 업무 스타일, 인간관계, 삶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봉건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생산양식을 바꾼 이면에는 물과 증기의 힘을 이용한 기계화와 대량생산체제의 면모를 갖추게 한 전기라는 혁신적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정보기술을 통한 생산의 자동화와 신경제를 이끈 디지털 혁명 역시 기존 생산방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기술혁신이 동반되었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에 경제체제가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안정적으로 변혁을 꾀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고도화를 지탱한 경제패러다임은 사적 소유의 증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유보다는 접근을, 보유가치보다는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연결성이 강화된 협력적 공유의 보편화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봉건시대 소작농이 소유권 없이 관습적으로 관리하던 공유지를 수출용 양모 생산과 농업 자본주의 발전 등의 필요가 높아져 지배계급이 기존 공유지를 무리하게 사유화하면서 불거졌던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있다. 이를 통해 결국 수많은 소작농이 땅을 잃고 도시로 유입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대량생산체계를 가능케 했던 생산요소인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통적으로 소비 주체로서 수동적 역할에만 국한되었던 소비자가 정보통신기술 발전을 통해 정보의 접근성 확대와 강화된 연결성을 무기로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프로슈머(prosumer)로 거듭나게 되면서 오히려 기존 생산체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카오 승차 공유앱 서비스 합법화를 두고 카풀 서비스와 택시업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번 논란은 예전의 '우버 사태'를 재현하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승차공유를 통한 이용자의 편의성 증대냐, 혹은 기존 택시업계의 생존권 보장이 우선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팽팽한 밥줄 갈등 속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바뀌고 있는 변혁의 시기에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과 기술혁신 세력 간 갈등과 대립 양상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동반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공유 플랫폼이 가지는 변화의 역동성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두 세력 간 일치된 조화를 못 찾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의 안전성은 기존 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경제적 진보를 막으려는 시도가 번갈아 나타남으로써 흔들린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실패할 때 엄청난 붕괴가 발생한다"라고 한 랑게(Lange, O.)의 지적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스마트폰의 길 안내 서비스를 빼앗고 멀미 나는 지도책을 다시 쥐어주며 옛날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과연 기술혁신이 불러올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현재 누리는 편리함을 깨끗이 포기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