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호 아트스페이스 어비움 대표·큐레이터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 문화 예술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고 싶습니다" 조두호 어비움 대표가 자신의 갤러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조두호 아트스페이스 어비움 대표·큐레이터
주민에게 베푸는 '지역공동체 기획'은 … 텅 빈 마을을 문화로 살찌우겠단 노력 

국민 화백 박수근은 유년 시절 일생일대의 경험을 한다.
가난한 형편 탓에 그림 그리기를 포기해야 했던 소년 박수근은 이발소 한 귀퉁이에 걸린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 '만종'을 보고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진품도 아닌 복사본 그림에 매료된 소년은 그 날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발소라는 작은 전시장에 내걸린 사소한 작품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유명한 일화다.

그도 그랬다. 어린 시절 이름 모를 누군가의 전시회에서 받았던 감동은 오늘날 그가 큐레이터로서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어줬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마을'을 책임져 보기로 했다. 작품 대신 마을을 큐레이팅하는 문화기획자, 아트스페이스 어비움 조두호(39) 큐레이터를 만났다.

"그 공간이 어디든, 어떤 형태든 지역주민들에게 예술 혹은 문화라는 것이 소소한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곳이 갤러리고 그곳이 공연장이라 생각해요."

호젓한 풍경 속 자욱이 내려 깔린 안개, 그 사이로 등장한 붉은 띠를 두른 건물 하나, 운치 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 첫인사를 나누며 건넨 세장의 명함, 한 장에는 큐레이터 조두호, 또 다른 한 장에는 문화기획자 조두호, 나머지 한 장에는 아트스페이스 어비움의 대표 조두호까지, 달리 새겨져 있는 사연들이 궁금했다.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아트스페이스 어비움으로 안내하는 큐레이터 조두호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들어선 어비움의 모습은 여느 갤러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비움에는 일반 갤러리에 걸지 않는 '특별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전시 기회가 많지 않은 유능한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랬죠. 지역 주민들에게는 우리 동네 유일의 문화 공간이 생기고 작가들에게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공간, 제가 바라는 아트스페이스 어비움의 모습이죠."

그의 답변을 듣고 문득 스친 생각은 가난한 탓으로 살아 생전 개인전 한번 열어보지 못한 화가 박수근에게도 당시 어비움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조 큐레이터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카페 어비움과 아트스페이스 어비움을 운영하며 미술전시 큐레이터인 동시에 지역 공동체 예술 확대를 위한 문화기획자로서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평소 지역 공공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던 그는 안양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소속 당시, 재래시장인 석수시장의 유휴공간에서 대안예술을 기획하고 젊은 예술가 발굴과 공동체예술에 대해 탐구했다.

이후 수원시 미술전시관에서 학예연구팀장으로 일하면서 전시, 교육, 지역미술 연구 등을 진행했다. 공공예술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서울시 정릉동 '3분 45초'와 양주시 '장흥오라이', 수원의 공공하천을 배경으로 '위대한 유산, 공공의 천'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경기천년을 기념하는 '경기아카이브-지금' 특별전의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포천시 관인면에서 문화재생 '관인플레이그라운드'의 예술감독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해오고 있다.

"문화재생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쇠락해진 마을과 무너진 지역 공동체를 문화 예술로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문화기획자로서 조두호가 전하는 소망이다.

"지금은 도심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떠나버린 텅 빈 마을도 지난날의 영광이 없진 않죠. 쇠락한 마을들이 존폐 기로에서 문화 예술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고 싶습니다."

#해시태그 토크
#문화재생 #어비움 #경기천년아카이브
: '어비움'은 지역명(어비리)이기도한 한자어 물고기 '어(漁)'와 살찔 '비(肥)' 그리고 박물관, 미술관을 뜻하는 영문 뮤지움(museum)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문화가 살찌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지은 어비움을 키워드로 꼽겠습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는
▲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는 "센터에 입사해 백남준 공부를 다시 했다"며 "새로운 시각에서 작품을 이해 한다"고 말했다./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이수영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각'을 갖도록 … 백남준의 모든 것을 파고든지 10년째

올해로 개관 10주년,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은 그의 바람대로 오랜 시간 '백남준'을 살게 했다. 시대를 앞서 간 아티스트답게 P자 형태를 띤 멋들어진 '집'은 평소 그의 음악 사상이 묻어난 그랜드 피아노 또는 그의 이름 앞 글자 'P'를 딴 것 같기도 하다. '백남준아트센터'를 두고 하는 얘기다.
그가 사는 집, 크리스텐 쉐멜 손에 지어진 백남준 아트센터는 강산도 변하게 한다는 10년이라는 세월 속, 여전히 세련된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비록 그는 센터가 문을 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상, 철학은 여전히 백남준 아트센터로 남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만 알고 있기 아까운 아티스트' 백남준을 세계적 거장으로 빛나도록 도운 '백남준 아트센터'와 10년째 '백남준 앓이' 중인 이수영(43) 큐레이터을 만났다.

"작가나 작품을 얼마큼 또는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나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해요. 작품이나 작가의 다른 면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것 역시 큐레이터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남준 아트센터를 둘러싼 오색 단풍들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중이라도 나온 듯 반겨주고 있었다. 영상 촬영이 동반한 인터뷰인지라 장소 선정에는 늘 신중하지만 백남준아트센터만은 예외였다.
어느 앵글에 초첨을 맞춰도 작품이 됐다. 멀찍이 마주 걸어오는 이수영 큐레이터의 미소와도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이수영 큐레이터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센터가 들어 선 2008년부터 10년째 이곳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 기획, 학술 프로그램, 심포지엄 등 다방면의 큐레이터 일을 해오고 있다.
최근 그녀는 개관 10주년 기획 '#예술 #공유지# 백남준' 전시와 강연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조금 특별했죠. 10년이라는 긴 시간만큼 백남준아트센터를 되돌아보고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백남준 이름을 건 전 세계 유일의 미술관답게 그의 사상, 예술작품, 생각, 글 등을 연구해 온 시간들이었죠."

그가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20살 무렵이었다. 조각 공부를 해오던 때, 당연하게 따라온 미술 이론 공부와 작가들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무척 흥미로웠다. 우연찮은 기회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미술관 일은 벌써 12년째 이어오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에 개관 멤버이기도 한 그녀는 지금은 세계인들이 찾는 미술관으로 성장했지만 열악했던 개관 당시 상황을 추억했다.

"개관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하면서 고초들을 겪었죠. 구성원들과 의기투합해 바탕을 다졌던 지난 일들과 개관의 경험들은 큐레이터로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

큐레이터로서 이제는 제법 연차가 높은 그녀지만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걸음 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을 해오고 있다.
"미술계는 시시각각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죠. 변화무쌍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혼자 보는 시각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해시태그 토크
#백남준 #전시 #공간
: 저에게 백남준 작가는 떼려야 뗄 수 없죠. 작가 백남준이 가진 콘텐츠의 다양함, 깊이, 그가 살아온 시대 등은 알면 알수록 즐거움을 줍니다. 특별히 공간을 키워드로 꼽은 것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매번 같은 공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직업이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연구가 항상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