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실크로드를 가다] 14. '일대일로(一帶一路)'… 아편전쟁 능욕을 딛고 중화제국의 부흥을 향한 길
▲ 영국함대의 포격에 침몰하는 청국 전함

 

▲ 임칙서가 아편을 폐기하는 장면

 

▲ 공원으로 변한 샤멘(沙面)거리

 

▲ 18세기 초의 월해관 모습

 

▲ 8세기 차 판매 상점 모습

 

▲ 오늘날의 광저우 13행 거리 모습.

 

▲ 영국군에 대항한 삼원리 백성을 기리는 사당

 

 

英, 청나라 茶수입에 적자 심해

아편 밀수출 시작 … 중국인 피폐

淸 임칙서, 아편 몰수하고 폐기

英 이를 빌미삼아 전쟁 일으켜

淸 전쟁 패배 뒤 난징조약 맺어

광저우 13행거리, 아편전쟁 시작

180년전 아픔 박물관에 고스란히


광저우(廣州)의 주장(珠江)변에 있는 13행(行)거리는 오늘도 늘어선 상점과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은 17세기에 서양 상선들에 의한 해상실크로드의 출발지로서 이름 높았다. 18세기에는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국제무역의 최대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지금도 상점 골목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유럽풍의 건물들은 당시 13행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 거리는 중화제국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인 아편전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해왔던 중화제국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영국에게 무너진 전쟁이다. 1

3행의 발전은 중화제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했지만, 밀려드는 서양의 요구에 조공질서만으로 대응하다 무너진 현장이기도 하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명대의 해금정책을 깨고 밀려드는 서양 상선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4곳에 세관을 설치했다.

원타이산(雲臺山)의 강해관, 닝보의 절해관, 샤먼의 민해관, 광저우의 월해관이었다.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의 월해관을 제일 많이 찾았다. 강바닥이 넓고 수심이 얕아 배를 접안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광저우는 천혜의 항구라는 이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재력과 실력을 갖춘 상인을 선발, 서양 상인과 거래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다.

대신 그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상점을 '양행(洋行)'이라 하였고, 광저우에는 모두 13곳이 있었다. 다른 세관에도 양행이 있었지만 광저우만큼 재력이 튼튼하지 못했다.

광저우의 13행은 자본뿐만 아니라 인맥도 넓었다. 상품거래도 계약서조차 필요 없이 성실과 신뢰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은 서양 상인들에게 몹시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80%가 넘는 서양 상선들이 월해관으로 몰려들었다.

강희제를 이은 건륭제는 광저우만 개방하는 '일구통상(一口通商)'정책을 시행했다. 서양의 상선들이 중국 대륙을 속속들이 다니는 것을 금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서 없는 것이 없고, 더욱이 외국의 산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중화적 조공질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한 서양 상선은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중국과의 무역은 엄청난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놓칠 수 없는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를 수입하고 모직물과 면화를 팔았다. 중국은 이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차(茶)는 영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영국인의 차 문화는 오후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대중화되었다. 영국의 차 수입은 중국에서의 수입물품 중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거래는 은(銀)으로 지불하였는데, 영국은 매번 엄청난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만 했다. 영국은 날로 무역적자가 심각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했다.

아편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다. 한번 아편에 맛을 들이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천 상자에서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로 늘어났다. 고위관료에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약을 피웠다. 중국 전체가 마약굴이 되어 사람들을 피폐시켰다. 이제는 중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삼아 광저우로 급파했다. 임칙서는 아편을 몰수하여 폐기시키고 부패관리들을 엄벌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켰다.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화제국 청나라는 '가장 치욕적'으로 패배했다. 광저우 삼원리(三元理)의 백성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영국군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영국해군의 엄청난 화력은 부패로 종이호랑이가 된 제국을 여지없이 불살랐다. 결국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항하는 난징조약에 서명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큰 이익을 보지 못하자 중국관리가 자국의 함정에 들어와 국기를 내린 것을 핑계로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도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에 참여했다. 청나라는 또다시 패배하고 도시 개방의 확대, 선교활동의 보장, 군함의 입항 허락 등을 담은 베이징조약에 서명했다.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도 물었다.

광저우의 13행 거리에서 180년 전의 아픔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의 조차지였던 사몐(沙面) 거리에는 당시의 영사관과 상점, 은행 등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도 서유럽풍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공원이 되어 청춘남녀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아편전쟁의 치욕을 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날의 모든 상황은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13행 거리에도, 자의국(咨議局) 자리에도 박물관이 있다. 주요 항구도시에도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나아가 별도의 아편전쟁박물관, 해전박물관도 있다.

그리고 오늘도 무료로 개방한다. 소리 높여 외치지 않고 전 국민이 스스로 조용히 깨닫게 하고 있다. 탐사단은 박물관을 돌아보며 중국인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정신을 떠올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작년에 "이제 중국공산당은 아편전쟁 이후 온갖 능욕을 당했던 암담했던 중국의 처지를 완전히 바꿨다"고 선포했다. '중국몽(中國夢)'으로 대변되는 중화제국의 위대한 부흥을 역설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대국이 되었다.

미중무역전쟁을 치를 정도로 부상했다. 또한, 중국몽 실현을 위한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해양국가다. 지정학적으로도 동아시아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이런 까닭에 고대에는 바다를 장악한 해양강국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역사를 잊은 지 오래다. 21세기는 대양(大洋)의 시대다.

 

바다를 경영하는 능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다.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 이미 너무나 늦었기 때문이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