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실장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저녁, 오랜만에 서울을 갔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빈 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한 젊은 여성이 숨을 몰아쉬며 가게로 뛰어 들어온다. 바로 주인장을 붙들고 하소연을 한다. "지하철 출구를 잘못 알아 30분이나 헤맸다"는 것이다. 남양주에서 2시간을 달려 왔지만 알바 첫날부터 지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장은 "예약도 많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라"고 한다. 일순간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는 청년 여성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걸 보고야 말았다.
아, 이런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청년 백수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어렵다더니. 기껏 달려 가봤자 오고가는 시간만 빼앗는 서너시간짜리 뿐이라더니.

#알바 구직 청년의 눈물과 '서울가족공사'
바로 그 이튿날,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이 터져 나왔다.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의 '일자리의 대(代)물림'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을 미리 알고 가족들을 먼저 대기시켜 놓는 수법 등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 전환 1285명 중 108명이 재직자의 자녀·형제·배우자 등이었다. 남매·삼촌·사촌·부모·형수·제수·매부에 며느리·5촌·6촌 등 가지가지였다.
그 108명도 스스로 신고한 부분에 불과했다. 빙산의 일각이란 얘기다. 이 와중에도 인사처장이라는 사람은 자기 부인 이름은 빼버렸다. 그야말로 '서울가족공사'였다.
우리 불쌍한 청년들의 일자리들이 그만큼 날아간 셈이다. 아니, 빼돌려진 것이다. 그 결과, 서울교통공사는 2020년까지의 공채를 1029명이나 줄여야 하게 됐다. 여기 한번 들어가 보겠다고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으며 열공하던 청년들만 '곰바우'가 됐다.

#사돈의 팔촌에 시육촌, 며느리까지
이후 자고 나면 고용 세습 의혹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신의 직장들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시육촌 관계 1명'이라고 했으나 4명으로 늘어났다. 한국가스공사는 처음 친·인척 관계가 25명이라고 했다가 3일 후에는 33명, 4일 후에는 41명이라고 했다. 부인·아들·딸·조카·처남 등이 추가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다 옮겨 적기에도 숨이 차다. 인천공항공사, 한국국토정보공사, 한국도로공사, 한전KPS, 한국남동발전, 서울주택도시공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대병원, 전북대병원…. 아마도 지금쯤 친인척 관계를 감추려 가족관계등록부를 쪼개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총무팀장이 조카 셀프채용도
지방 공기업이라고 다르겠는가. 대전도시공사의 경우 7명이 이미 확인됐고, 경남무역에서는 채용을 담당하는 총무팀장이 직접 조카를 채용했다고 한다. 공공노조 인천본부는 "인천 지방 공기업들에도 공무원이나 지방의원들의 친인척, 친지들이 부지기수"라며 전수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 취업 커뮤니티에 '교통공사 면접 잘 보는 법'이 떴다. "지하철을 모는 친척을 보며 입사 꿈을 키웠습니다." 청년들의 한숨이 쏟아진다.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노량진 젊은이들에 미안하지도 않나' '부모 빽 없어 인생이 이렇게나 힘든가' '바보같이, 친인척 전형인 줄도 모르고'

#'부모 '빽' 없어 인생이 이렇게나 힘든가
우리 청년들은 지난해 채용비리 파문 때 이미 크게 상처 받았다. 신한은행 등 금융기관이나 금융공기업 등에 국정원·금감원 등 힘센 이들의 자제들이 줄을 서 들어간 걸 목격한 것이다. 그냥 '신의 직장'이 아니다. '신도 부러워 하는' 일자리들 아닌가.
6·25때 총을 맞은 병사가 죽어가면서 내지른 비명이 '빽!'이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빽' 없는 농민의 자제들만 최일선에 내몰렸기 때문이라는 거다.
어쩌다 대한민국이 70년 전으로 뒷걸음질 했는가. 여와 야, 이전 정권과 현 정권간의 정파싸움 꺼리가 아니다.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긴다"며 덮을 일도 아니다. 오늘 우리 어른들은, 힘든 청년들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