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이병훈 경기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가장 좋습니다"
경기천년을 맞은 2018년. 경기도 곳곳에서는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활짝 꽃을 피운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더 많다. 전시회의 꽃은 작가의 작품이지만 이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은 전시 기획자의 몫일 것이다. 조상의 얼이 담긴 우리의 문화재에도 이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이들의 손길이 담겨 있다.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오늘도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 문화예술인의 이야기는 그래서 싱싱하다. 인천일보는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밖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30~40대 젊은 문화예술인 20인을 만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글과 사진, 영상으로 담았다.

 

▲ 정재훈 선임연구원이 남한산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정재훈 선임연구원이 남한산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정재훈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남한산성을 지탱하는 '주춧돌'처럼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산을 지켜낼 것

"여기서 나가면 또 어디로 갈 건데 오랑캐 피해서 온 곳이 여기다. 이제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사는 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을 최후의 보루이자 병기로 삼은 서날쇠(고수)의 대사다. 외세의 침략이 숱하게 이어지는 난국의 시대, 그들에게 남한산성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패전의 역사로 얼룩진 남한산성의 오명은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함께 씻겨 갔다.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는 결코 녹록지 않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했다.

그 중심에 정재훈(42)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이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흡사 '서날쇠'의 모습처럼 여전히 산성에 남아 다음 꿈을 설계하고 있는 그였다. 가을 단풍이 장관을 이룬 남한산성에서 그를 만났다.

"잠깐 이슈로 그치는 관심이 아니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평일이지만 여전히 남한산성 일대는 단풍놀이를 즐기러 온 등산객들로 붐볐다. 성곽 길을 둘러싼 노송들과 울긋불긋 수놓은 단풍들은 외세 앞에 무릎 꿇게 한 뼈아픈 우리 역사의 단면을 치유해주는 듯했다.
남한산성 곳곳을 지나는 와중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그의 해설은 정재훈 연구원의 '남한산성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했다.

정재훈 선임연구원은 경기문화재단 산하기관인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서 산성 내 문화재 보수와 정비 사업, 설계, 공사, 발굴 등 문화재 전반의 감독 업무를 맡고 있다.
그의 업적을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이다. 지금은 연간 320만명이 다녀갈 정도의 명소가 된 남한산성이지만 결코 쉽게 얻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등재되기 이전의 남한산성은 그저 닭백숙이나 먹으러 가는 유원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죠. 세계유산 등재가 된다면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놓고 국가 역사의 치부를 들춰낸다는 여론에 비판도 상당했다.

"2009년부터 등재를 준비했습니다. 전담 부서를 꾸리고 세계유산 등재 경향을 파악하는 특별 전담 팀까지 마련해 등재에 사활을 걸었죠. 그 결과 5년 만인 2014년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을 거뒀습니다"
남한산성이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수한 성곽 축성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 번은 세계유산 실사자가 산행 길을 오르던 중 힘이 들었는지 무심코 흙바닥에 앉으려 했죠. 냉큼 휴대용 의자와 쿠션을 내놓았더니 실사자는 한국에 온 지 이틀 만에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당신들은 내가 원하면 별도 따다 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최근 정 연구원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숭렬전의 해체 보수공사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정 연구원은 향후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 작업을 벌였던 '개성 한옥마을 보존사업'과 같이 다시 한번 그 날이 오길 소망하고 있다.
"개성 한옥마을 복원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경기도가 이 같은 사업을 함께 하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해시태그 토크
#주춧돌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 궁궐이나 옛 가옥같은 문화재를 볼 때 우리는 화려한 단청만을 보잖아요. 그 기와를 지탱해주는 것은 기둥 아래의 '주춧돌'이고 역할이 매우 중요하듯 저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남창섭·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이병훈 경기도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백제 생활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이병훈 경기도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백제 생활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이병훈 경기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흙' 속의 작은 유물이 역사 바꾸듯 … 유실되는 일 없도록 보존구역 넓혀야

1018년 고려의 제8대 왕 현종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1만172.4㎢의 이 땅을 경기(京畿)라 정명했다.
올해로 경기가 탄생된 지 천년을 맞이한다. 무구한 역사 속, 경기 천년을 이룩해 온 오늘날, 개발에만 몰두하던 이들을 비집고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우리 문화재 보존에 누구보다 힘써 온 이들이 있다. 지난 18일 경기문화재연구원 이병훈(42) 선임연구원을 오산시 내삼미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만났다.

"구제발굴은 개발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죠"
흙으로 뒤덮인 언덕을 오르자 유적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족히 1m는 돼 보이는 깊은 구덩이에서 삼국시대 백제 생활 토기들이 발굴됐다.

저 멀리 검게 그을린 피부의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의 모습에서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을 짐작케 했다. 이병훈 선임 연구원이다.
이병훈 선임연구원은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도내 매장 문화재 발굴조사와 학술 연구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최근 이 연구원은 오산시 내삼미동 일대에서 시가 추진 중인 개발 사업을 앞두고 삼국시대 백제 생활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발굴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 개발 공사로 문화 유적이 발견되는 사례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개발과 보존 사이의 첨예한 갈등으로 어렵게 발굴한 숱한 문화재들이 도로 매장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다.
"개발만 강조할 수 없고 보존만 강조할 수 없어요.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우선인가를 논하기보다 발굴한 문화재들의 활용 방안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는 누구도 쉬이 가지 않으려는 길을 자부심 하나로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 연구원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개발 과정의 '걸림돌'로 치부되는 고충쯤은 거뜬히 웃어넘기는 우직함도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발굴해 온 작은 유물 하나가 역사의 기록을 바꿀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가 발굴한 문화재들이 역사 교과서를 바꾸고 시대상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10여년간 매장 문화재 발굴 조사에 매진해 온 이 연구원은 유실되고 있는 많은 문화재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했다.
"1만평 이상은 의무적으로 문화재 지표 조사를 통해 보존 가치를 인정받지만 그 이하는 의무 대상이 아닙니다. 많은 문화재들이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범위를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소속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이병훈 선임연구원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 점을 제외한다면 만족한 삶을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직업의 만족도를 놓고 보면 별 5개 만점에 4개 반 정도 줄 수가 있을 것 같네요.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저에게는 자존심이자 자부심을 갖게 하는 힘입니다"

#해시태그 토크
#흙 #매장문화재 #경기문화재연구원
: 흙이요. 가장 저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죠. 발굴 조사도 흙에서 하고 발굴된 토기도 흙으로 빚잖아요. 막연한 꿈 중 하나는 농사를 지으며 흙에 살고 싶단 생각을 종종 하는데 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키워드가 바로 이 '흙'인 것 같습니다.

/남창섭·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