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前 인천일보 주필

 

#군국 상징 욱일기(旭日旗)와 가짜 섬 '송도(松島)'
박물관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파 인근 약방을 찾았다. 급한 대로 '정로환' 작은 병 하나를 샀다. 1일 3회 세 알씩 먹는다는 복용법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참으며 입 안에 약을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예기치 않게 내가 "송도(松島)에서 정로환(征露丸)을 먹었다"는 꺼림칙한 연상이 떠올랐다. 일본 제국주의의 음습한 그림자가 식민 통치 후 7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사고(思考)의 배경이 되는 오관(五官)을 휘감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정로환'은 보통 소화제가 아니다.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데 비타민 B1 부족과 티푸스균으로 죽어가던 일본군을 살려 '러시아를 이기게 한 영웅적인 약'인 것이다. 서양인들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켰다고 자부하는 일본인들 아니던가?
'러시아를 정복한 약', 약 이름치고는 매우 고약한 극우(極右) 작명인데 일본 것과 모양이 똑같다. 다만 그들도 약명이 민망했던지 '정(征)'을 '정(正)'으로 바꾸긴 했으나 러일전쟁100주년 야스쿠니 행사에 전시됐던 걸 보면 속내를 알 것 같다.

인천시 연수구 관할 신도시의 이름 '송도'에도 군국의 망령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가꿔야 할 인천의 168개의 보물섬 가운데 '송도'는 없다. '송도'가 어떻게 만들어진 '가짜 섬'인지는 필자가 본보를 통해 누차례 밝힌 바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1939년 조선총독부가 인천부(仁川府)의 영역을 확정하면서 '옥련리(玉蓮里)'를 '송도정(松島町)'으로 바꾼 게 화근이었다. '정'이란 '동(洞)'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인데 육지인 옥련리가 느닷없이 '소나무 섬 동네'가 됐던 것이다.
그 같은 강제 지명 개정에는 허수히 넘길 수 없는 배경이 있다. 일본은 요코하마를 찾은 청나라 북양함대의 위세에 놀라 서둘러 군함 세 척을 건조했는데 그를 가리켜 '삼경함(三景艦)이라고 했다. '삼경'이란 일본의 3대 명승지를 가리킨다.

#욱일승천기 달고 인천 앞바다를 휘저었던 송도함
그 가운데 하나가 지진 피해가 극심했던 미야기 현의 송도이다. 삼경함의 한 척인 '송도함'은 청일전쟁, 제물포해전, 황해해전 등에 참전해 승전하면서 인천항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이 군함도 최근 문제가 된 '욱일승천기'를 꽁무니에 달고 다녔다.
약칭 '욱일기'는 16개의 햇살을 방사형으로 그려 아침 해가 떠오르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일본 극우파의 상징이다. 1870년 태정관 고시에 따라서 육군이 먼저 사용하였고, 해군은 1889년 군함기로 채택했다가 1945년 패전 후에 폐지했었다.

#신도시의 이름 '송도', 후세에 대물림할 수는 없어
'욱일기'가 재등장한 것은 1954년의 '자위대법(自衛隊法)에 따른 것으로 현재는 해군이 주로 사용하고, 육군은 해외 출병 이외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2007년 '욱일기'를 단 일본 군함이 인천항에 출현했을 때도 시민단체가 항의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제물포해전의 당사자인 러시아가 연안부두에 '추모비'를 세운 후 당시 침몰했던 군함과 똑같은 이름의 거대 순양함을 끌고 와 매년 우리 해군 협조 아래 추모식을 하는 꼴을 보면 동북아의 암울한 정세가 백여 년 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제주도의 국제관함식에 참석하려던 일본 해상자위대가 자국기와 태극기만을 달아 달라는 우리 측 요구에 불응하고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여당은 욱일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가야 할 길이 먼 '한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다 치고, 맘만 먹으면 씻어낼 수 있는 일제 잔재 청산을 우리 국회가 앞장선 적이 있는가 되묻고 싶다. '욱일기' 타령보다는 먼저 '송도'와 '송도역'이란 명칭부터 고치자. 우리 스스로 '망령'을 부활시켜 대물림할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