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12. 동방제일 무역항 '취안저우(泉州)' 도자기와 향료의 시종점(始終點)
[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12. 동방제일 무역항 '취안저우(泉州)' 도자기와 향료의 시종점(始終點)
  • 남창섭
  • 승인 20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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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항구도시의 역사, 고요히 흐르다

 

▲ 당대(唐代) 취안저우의 외항(外港)이었던 마웨이(馬尾)항.

 

▲ 고대 취안저우의 대표적 등대였던 류셍탑(六勝塔)

 

▲ 전세계 석재 수출입의 중심인 신석호항

 

▲ 신라스님 현눌선사가 불법을 전수한 푸칭사(福淸寺)

 

▲ 민안촌에 있는 지옹롱(逈龍)교.

 

▲ 당 현종시기에 번성했던 석호부두(石湖碼頭).

 

▲ 고려인들이 정박했던 고려항(高麗港) .

 

▲ 아랍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 상.

 


당 현종 시절부터 아랍 무역


도자기·비단 수출 … 향약 수입

아랍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

'세계 최대 항구도시'라 불러

외항 마웨이항 당시 돌계단 선명

동남아 조공선 다니던 지옹롱교

벽란도서 오가던 항구 고려항

신라 현눌선사 위해 지은 푸칭사

한반도와 왕래 … 집단 거주지도

종교 융합 도시 … 일대일로 시발




취안저우(泉州)는 중국 푸젠(福建)성 진장(晉江)하류에 발달한 항구도시다. 이곳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곳으로 당(唐)나라 중기부터 무역항으로 유명했다.

당나라 초기에는 상업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육상 실크로드가 개통되자 이제까지의 정책을 수정해 상업과 교역을 적극 장려했다.

하지만 돌궐, 토번 등으로 인해 육상교역은 오래 가지 못하고 어려움에 봉착했다. 엄격한 감시와 통제도 이뤄졌다. 반면에 해상교역은 특별한 제재 없이 적극 장려했다.

취안저우가 국제무역항으로 부상한 것은 당 현종(玄宗) 때다. 이때부터 취안저우는 송·원·명대에 이르기까지 아랍 상인들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

취안저우는 11세기 송(宋)나라 때부터 외국과 본격적인 무역을 위한 항구로 발전한다. 이를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관리하는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고, 유럽에는 '자이툰'(Zaitu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특히, 요·금(遼金)에게 북방지역을 내주고 밀려난 남송(南宋)시대는 조선술과 항해술 및 나침판의 발달로 원거리 해상교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이때 주요 수출품은 비단과 도자기였다.

특히, 도자기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 유럽으로 다량 수출되었는데 육로보다는 해로가 운송에 편리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교역로를 '도자기의 길'이라고 불렀다.

주요 수입품은 대부분 향약(香藥)이었다. 향료를 의약으로도 사용하였기에 붙인 이름이었다.

20여종에 이르는 향료가 동남아 반도, 인도 및 아랍 등지에서 수입되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향료무역은 아랍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 교역로는 '향료의 길'이라고 하였다.

원나라는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이는 해상실크로드를 더욱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남아시아의 각국과 인적 교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교류의 중심항구 역시 취안저우였다.

취안저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항의 하나로서 40여 개국과 교역을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비단, 도자기와 함께 차(茶)와 칠기(漆器)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13세기 초, 아랍의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가 이곳을 들렀다.

그는 이곳에 '페르시아와 아랍상인들이 많으며, 페르시아산 카펫과 무기, 동제품(銅製品) 등이 수입되고, 인도와 오만 등지로는 도자기가 주로 수출된다'며, 취안저우를 '세계 최대의 항구도시'라고 하였다.

차(茶)를 영어로는 '티(tea)'라고 하는데 이는 이쪽 지역의 발음인 '떼(te)'에서 온 것이다.

이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도 비슷하게 부른다. 취안저우가 송원(宋元)시대를 거치며 동방 제1의 무역항이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원나라 때에도 주요 수입품은 향료였다. 진귀한 물품들도 수입대상이었는데 그 종류만도 220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나라 때 국제무역항이었던 곳은 외항(外港)에 해당하는 마웨이(馬尾)항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정박한 배에 교역품을 싣고 나르던 돌계단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고대 실크로드 교역항이었다는 표지석만 우뚝할 뿐 그마저도 폐자재와 쓰레기에 묻혀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마웨이항에서 강줄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민안춘이 나온다. 이곳에도 당나라 때부터 부두로 사용하였던 지옹롱(逈龍) 석교가 있다. 이곳으로는 동남아 지역의 조공선(朝貢船)이 드나들었다.

취안저우만 입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당나라 때 번성한 석호부두(石湖碼頭)가 있다. 이 부두는 당 현종시기인 710년대에 지어졌다. 그럼에도 아직도 80여 미터에 이르는 부두 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석호부두 건너편으로는 진차이산(金釵山)이 있고 정상에 류셍탑(六勝塔)이 우뚝하다. 이 탑은 무역선을 위한 등대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이처럼 불탑 형태의 등대가 항구가 보이는 구릉이나 산에 세워졌다.

원나라 때 세워진 이 탑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산 정상에 우뚝하다. 육승탑 뒤로는 각종 석재를 교역하는 석호항이 있다. 부두에는 쌓아놓은 석재가 어마어마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양을 수입하는 곳이다.


취안저우는 한반도와도 왕래가 많았다. 집단거주 흔적인 신라촌(新羅村), 고려촌(高麗村)도 있고, 고려항(高麗港)도 있다. 고려항은 고려의 벽란도를 오가던 무역선이 정박했던 항구다. 지금은 시장으로 변했고 지명도 쿠이샤강(奎霞港)으로 바뀌었다.

푸칭사(福淸寺)는 당나라 때 사찰이다. 당시 취안저우 자사 왕연빈(王延彬)이 신라의 스님 현눌선사(玄訥禪師)를 위해 지은 것이다. 선사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불법을 전수하였다. 당시의 푸칭시는 커다란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찾는 사람이 드문 쇠락한 절이 됐다.

남송과 고려는 물적·인적 교류를 많이 했다. 취안저우에 있는 가오리춘, 가오리강은 고려에서 온 유학생, 상인, 승려 등이 집단거주한 곳이다. 고려인들이 먹었다는 고려채(高麗菜)는 지금도 식당의 메뉴판에서 볼 수 있다. 고려를 오간 중국상인도 취안저우 출신이 가장 많았다. 백년간 4500여 명에 이른다.

이처럼 취안저우는 당나라 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다. 전 세계의 상인들은 물론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적인 종교가 융합하는 글로벌 도시였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에도 취안저우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동방 제일의 무역항이자 해상실크로드의 출발지였던 취안저우. 취안저우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오늘도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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