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올 추석 연휴기간 오랜만에 친지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친척 중에는 70살을 바라보는 분도 있었고, 대부분의 지인들은 몇 년 후에는 60살이 되는 50대 중후반의 비슷한 연배이다. 젊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거나 밤늦게 불쑥 전화해도 마다하지 않고 하소연을 들어주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생업 때문에 지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몇 명 있어서 부모님 상을 당하거나 자식들의 결혼 등 경조사 때 만나든가 명절에야 모일 수 있게 됐다. 이들은 거의 인천 토박이거나 어렸을 때부터 인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고, 절반 가량이 부모님이 황해도나 평안도 출신의 실향민 가족이다.

이번에 만난 사람들의 화두는 단연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이들은 '9월 평양공동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도 의미 있었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 곳곳에서 보여주는 장면마다 감동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부모님 모두 평안도 출신이라는 한 선배는 평양순안국제공항에서부터 백화원 영빈관까지 김정은·이설주 부부와 평양시민들이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환대하는 장면에 뭉클했지만, 공항에서 문 대통령의 일명 '90도 인사'는 평양시민들은 물론 생중계되는 장면을 목격한 북한주민들에게는 충격적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을 거라고 말했다. 막내격인 한 후배는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에서 한 문 대통령 연설이 압권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든가 '70년간의 적대를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는 제안도 감동이었다고 했다. 하나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며 북한 주민들을 추켜세운 점과 '두 정상이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하고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15만명의 평양관중들 앞에서 대놓고 밝혔으니, 그야말로 불가역적 합의라고 그는 주장했다.

2007년에 평양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는 다른 선배는 지난 20일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남북정상이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을 볼 때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전날 밤 11시 넘어 능라도경기장 행사가 끝났고 당일 새벽 5시께 출발하는 강행군으로 백두산을 오른 것은 남북정상이 역사적으로 한 시대가 새롭게 변화하는 거대한 전환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일이고, 특히 한라산과 백두산의 물을 섞는 장면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탁월한 연출에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다른 선배가 '그런데 말이야'라며 불쑥 'BTS(방탄소년단)의 유엔연설'을 거론하고 나섰다.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그 선배는 막내 아들보다 어린 BTS의 연설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됐고, 그들이 빌보드 차트에서 여러 곡과 앨범이 1위는 물론 상위권에 오랜기간 머물러 있었으며, 그들의 팬클럽이 '아미(ARMY)'라는 것도 알게 됐고, 유엔연설 뒤에 NBC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라는 토크 쇼와 ABC 아침 뉴스 프로그램인 '굿모닝 아메리카'에도 출연한 것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이 이 만큼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100만명 이상의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현상은 역사상 처음이란 면에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또 BTS와 ARMY가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병역특혜 논란이 일었을 때 '우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든가 '다녀와야 할 곳이면 다녀오면 되고 우린 그동안 기다리면 된다'고 했을 때, 그들이 의연하고 명쾌하게 답을 내놓는 모습을 보고 올 추석에 받은 가장 멋진 선물이라고 했다.

90살 안팎의 실향민 부모를 모시고 사는 다른 선배는 페이스북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보내온 송이버섯을 맛있게 먹었다며 추석에 맞춰 받을 수 있게 배려한 점이 더욱 돋보였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물론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도 6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만났는데 우리는 1년에 한두 번 보기도 어려우냐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올 추석은 평양과 뉴욕에서 날아온 의미 있는 선물로 어느 해보다 풍요로운 명절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