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한 지인의 추석 후일담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들렸다. 7남매가 모두 자리를 함께 했다고 한다. 밤이 깊도록 술잔이 오가며 장남인 그도 대취했다. 취흥이 도를 넘으면서 저도 모르게 맘에 없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니들은 이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니들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등등. 순식간에 분위기는 깨지고 이튿날 아침 되려 그만큼의 공격에 시달렸다고 했다.
▶올 추석에도 곳곳에서 가족간 다툼이 빚어졌을 것이다. 부천에서는 50대 아버지가 30대 아들을 흉기로 찔렀다. "가족들이 홀대해서"라고 한다. 대구에서는 아버지와 다투던 아들이 집에다 불을 질렀다. 함께 살고 있는 집을 파는 문제가 발단이었다. 경찰이 개입하지 않을 정도의 가족간 다툼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경찰 통계로는 명절 연휴 기간의 가족 다툼이 평소의 1.5배 수준이라고 한다. 명절에 모이면 왜들 싸울까. 전문가들은 자기애적 인격이나 경계선 인격, 의존적 인격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날이어서 그렇단다. 즉 자기밖에 모르거나, 좋고 싫음이 극단적이거나, 책임을 타인에게만 돌리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이들은 전두엽의 대뇌피질이 좀 다르다고 하니 그 사람들 탓만도 아니긴 하다. '관계'에 대한 과잉기대의 결과다.
▶'행동하는 며느리들'이라는 기사 제호가 눈길을 끈다. '명절 폐지' 청원과 함께 이번 추석 최강의 뉴 트렌드라고나 할까. '시댁 안갔다' '나홀로 여행을 즐겼다' '시댁에 가서도 할 말 다했다' 그 전 같으면 '이번엔 여차여차해서 시댁 못갔네요' 할 것을 '시댁 안갔어요 왜 잘못 됐나요'라는 식이다. 이번 연휴 해외여행객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도 이들 '행동하는 며느리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불현듯 'SNS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연구 보고서가 생각난다. 여성과 20대에서 SNS를 그만 두고 싶어하는 성향이 아주 높아졌다는 내용이다. 끝이 없는 SNS 세상에서 더 고독하고 우울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것 같아서"가 SNS를 떠나려는 심정의 저변이라고 한다. 넘쳐나는 '관계' 속의 고독이다.
▶그래도 우리네 명절이나, SNS도 처음부터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관계'를 너무 강요하거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관계'여서다. 다툼은 흔히 비교, 박탈감에서 시작된다. 가족이니까 더 남들과는 다른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에 다투는 것일 게다. 그래도 믿고 의지할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명제는 여전히 참이다. 명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꿔나가야 할 '관계'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