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에 떠밀려 다다른 명나라 … "나는 조선의 선비다"
▲ 중국 경항대운하의 출발지인 항주시내 운하 모습.


▲ 최부의 표류와 귀국 경로. /자료='최부 표해록 역주' 박원호 역,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 최부가 지은 <표해록> 본문.

▲ 최부가 지나간 영파의 상서교.

▲ 중국인이 그린 최부의 모습.
▲ 전남 무안에 있는 최부의 묘와 사당.


中 닝보 당송부터 해상교류 중심
장보고, 닝보까지 사단항로 개척

조선시대 제주 추쇄경차관 최부
고향가던 중 표류 … 닝보에 도착
왜구로 오해받고 호된 심문당해
북경 호송 … 명황제 홍치제 알현
의주 등 거쳐 6개월 만에 한양에
성종 명으로 표류기 표해록 작성

쑤저우·항저우 강렬한 인상 기록
고구려 도읍 요동 양국 인식 공유



닝보(寧波)는 중국 저장(浙江)성 창장(長江)하류에 발달한 항구도시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의 땅이었다.

당송(唐宋)시대부터 명주(明州)로 불리며 해외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신라와 고려 등 한반도와는 물론 일본과 동남아시아 및 아라비아 지역과도 광범위한 해상교류를 주도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는 닝보가 중국 내륙을 관통하는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서 육상과 해상을 잇는 교역의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장보고가 죽은 후에 산둥성 덩저우(登州)와 화이수이(淮水) 유역의 추저우(楚州)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재당신라인의 네트워크가 붕괴되면서부터 닝보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고대 한반도에서 닝보까지의 바닷길은 인천의 능허대, 경기만의 당항성에서 출발해 황해를 건너 산둥성 덩저우에 도착하고, 이곳에서부터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방법이 오랫동안 애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라인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중국의 강남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사단항로(斜斷航路)가 개척됐다.

사단항로는 중간 기착지 없이 닝보까지 가는 항로로 직선거리 600㎞다. 이 항로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이 필요하다.

또한, 계절풍과 해류 등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

즉, 해상활동 경험이 많은 전문가만이 운행 가능한 항로인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개척된 이 항로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항로로 발전했다.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해상교류를 전개했는데, 국제무역항인 예성강의 벽란도와 닝보는 양국 간의 해상교류를 증진시키는 대표적인 항구였다.


닝보는 계절풍과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까닭에 표류의 항구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시대의 최부(崔溥)다.

그는 전남 나주출신의 선비로 1487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부임했다. 그의 임무는 죄를 짓고 제주로 도망친 자들을 색출하는 일이었다.

최부는 이곳에서 몇 개월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16일간을 표류하다가 닝보에 도착했다. 사단항로의 계절풍은 여름에는 한반도 쪽으로 불고, 겨울에는 중국 쪽으로 분다. 해류도 마찬가지다. 최부는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동해안에 표류한 것이다.

중국 닝보에 도착한 최부는 처음에 왜구로 오해를 받아 호되게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의 관료이자 사대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내륙의 대운하를 이용하여 북경까지 호송되어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홍치제를 알현했다. 이후 만주와 의주를 거쳐 6개월 만에 한양에 도착한다.

한양으로 돌아온 최부는 성종의 명을 받아 자신의 표류기를 상세하게 적어 보고했다. 그가 지은 책은 오늘날까지 <표해록>(漂海錄)으로 전해져 온다. 그는 호송의 와중에도 중국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 최대의 상업도시였던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최부가 본 항저우는 외국의 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금과 은이 가득하였다. 이러한 풍요로움은 노랫소리가 끝이지 않는 도시로 묘사되었다.

쑤저우는 뛰어난 경치와 잘 발달된 운하로 인해 많은 물자들이 모여드는 동남 제일의 물류도시라고 평가하였다.

당시 최부의 기록에서도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최부의 기록에는 당시 중국인과 조선 선비의 요동(遼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 있다. 최부가 산둥 지역에 이르렀을 때 상인인 요동사람 진비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최부 일행에게 술과 떡 등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대접하며 "우리 요동성은 귀국과 이웃했으므로 그 두터운 정이 한 집안과 같은데,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 사례한다"고 말했다.

이에 최부도 "귀하가 사는 곳은 곧 옛날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다. 고구려는 지금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다.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마다 다른 점이 있지만 그 실상은 한 나라와 같다"고 답했다.

최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옛 도읍지가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양국이 모두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부가 요동에 도착해서도 나타난다. 요동에서 만난 계면(戒勉)이란 승려는 자신의 조부가 조선에서 도망친 이래 요동에서 3대째 살고 있었다. 그의 말 중에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지인데 중국에게 빼앗겨 소속된 지가 천여 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최부도 요동 땅에서 느낀 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동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지였는데, 당 고종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소속되었다.'

이렇듯 15세기 조선과 명나라 지식인들의 '요동'에 대한 인식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음을 알 수 있다. 최부의 <표해록>은 성종의 명으로 찬술된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허황된 일을 기록할 수 없다. 만약, 그런 내용이 있다면 수정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국가의 영토와 도읍지에 대한 것은 더욱 예민한 사항이기 때문에 잘못 기록하면 국가 간에 외교적인 마찰로 번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인의 이러한 요동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는 곧 고구려의 도읍지가 요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명나라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