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9. 미추홀 능허대 vs 장쑤성 난징, 황해를 주름잡던 백제의 바닷길
[해상 실크로드를 가다] 9. 미추홀 능허대 vs 장쑤성 난징, 황해를 주름잡던 백제의 바닷길
  • 남창섭
  • 승인 2018.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잘 있으라" … 백제 사신은 능허대서 中가는 배에 올랐다

 

▲ 인천 청량산에서 바라본 능허대 일대 모습. 지금은 개발로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려 본래 능허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멀리 송도 국제도시와 인천대교가 보인다.

 

▲ 백제의 중국과 일본 항로 지도.

 

▲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
▲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
▲ 능허대 정자
▲ 능허대 정자

 

 

 

 

 

 

 

 

 

 

 

 

 

 

 

 

 

 

 

 

 

 

 

▲ 능허대의 한나루터 전경.
▲ 능허대의 한나루터 전경.

 


한강 차지 백제, 황해를 내해삼아

中 동부·한반도 서부까지 영토로

백제 사신들, 한성서 문학산 넘어
능허대 전 고개서 가족과 작별인사
한나루서 바람 기다렸다 산둥으로

의자왕 왜국 실권자에 바둑판 선물
스리랑카 자단목에 상아로 만들어
백제 '인도·동남아 해상교역' 증거

능허대, 청량산서 뻗어나온 포구
도시개발 … 봉우리에 정자만 남아

 

한강은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중심이었다.

강 주변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황해로 이어지는 강물은 대중국 교섭의 주요교통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이곳은 고대로부터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가 되었고 이곳을 차지하는 국가가 한국고대사의 주역이 되었다.

삼국 중 한강유역을 먼저 차지한 국가는 백제였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가 각기 미추홀(인천)과 한성(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그 후, 온조가 비류를 흡수하고 한강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백제는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는 5세기 중반까지 황해를 통해 대중국 교섭에 앞장섰다.


백제(百濟)의 어원은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경영하는 나라(百家濟海)'에서 나왔다. 백제가 일찍부터 황해를 경영하는 해상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고이왕 때인 280년에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의 서진(西晉)과 통교하였다.

10년간 8회의 사신이 황해를 오갔다. 백제가 황해를 무대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시기는 남북조시대다.

특히,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과는 33회에 이르는 사신을 보냈다.

우리의 고대사 중 백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백제의 영토연구는 더욱 시급한 실정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사서인 <신·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의 영역이 다음과 같다고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이며, 남쪽은 왜(倭)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가 있다. 백제의 왕이 있는 곳은 동서로 두 성이 있다'

월주는 지금의 중국 저장(浙江)성의 양자강 남쪽 회계(會稽)지역이다. 이 기록은 백제가 황해를 내해로 삼아 중국 동부와 한반도의 서부를 아우르는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의 왕들이 동서로 두 성에 있었다는 것도 내륙백제와 반도백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인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제서(南齊書)>, <북제서(北齊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양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가 요서지역을 차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많은 사서들은 위서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사서가 백제의 영토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이 같이 기록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우리의 교과서는 백제는 언제나 한반도 서쪽에만 있었던 국가로 단정하고 있다.

인천은 백제의 대중국 교섭의 전진기지였다. 한성에서 출발한 백제의 사신들은 문학산을 넘어 능허대(凌虛臺)에 이르고, 이곳에 있는 한나루(大津)에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산둥 반도로 출항하였다. 능허대의 한나루가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백제와 남조가 황해를 오간 항로는 어디였을까. 남조지역에서의 출발지는 건강(建康)이었다. 오늘날의 난징(南京)이다. 이곳의 창장(長江)을 따라 황해로 나온 후 연안을 따라 산둥반도의 청샨터우(成山頭)까지 올라갔다. 이곳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강화만(江華灣)에 이르고 인천의 능허대에 도착하였다.

백제의 초기 대중국 교류는 주로 정치, 외교적인 목적이었다. 그 후에는 각종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는 중국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중재자 역할도 하였다. 백제와 일본의 항로도 능허대의 한나루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을 출발한 백제선은 황해연안을 따라 남하한 후 제주해협을 거쳐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를 지나고 간몬해협(關門海峽)과 세토내해(瀨戶內海)를 통과하여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백제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황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제는 황해에서의 제해권(制海權)을 공고히 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은 당시 왜국의 실권자에게 바둑판을 선물하였다. 바둑판은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것이고, 19줄의 선은 상아로 만들었다. 17개의 화점(花點)은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자단목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의 스리랑카이다. 상아 역시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주산지이다. 의자왕이 왜국의 실권자에게 선물한 바둑판은 백제의 해상교역활동이 황해는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기 전까지 인천을 중시하였다. 계양산과 문학산에 각각의 산성을 쌓고 활용하였다. 계양산성은 고구려를 방어하는 동시에 간척지 일대에서 생산한 소금을 수송하는 교통로였다. 문학산성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능허대와 한나루로 이어지는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였다.

6세기 중엽, 한강유역은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신라는 대중국 교통로로 당항성을 활용하였다. 그 결과, 문학산성과 능허대를 잇는 길은 점차 잊혀져갔다. 하지만 계양산성은 그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신라에서도 계속 사용하였다. 계양산성에서 통일신라시기의 명문기와조각이 출토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능허대로 향할 때 문학산성을 넘어 갔다. 그의 가족들도 문학산까지 배웅을 왔다. 그리고 저 멀리 능허대가 보이는 고갯길에서 이별을 했다. 사신들은 고개에서 떠나지 않고 서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잘 있으라"고 세 번 불러보고 능허대로 향하였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삼호현(三呼峴)'이라고 불렀는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면서 '사모지 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고개는 80년대까지만 하여도 송도앞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팔기 위해 넘어가던 고개였으며, 드넓은 남동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사기 위해 넘어오던 고갯길이었다.

지금은 문학터널이 뚫리면서 주변 일대가 개발되어 터널 위쪽의 고갯길만 남아있다.
삼호현에서 가족과 이별한 사신들은 지금의 옛 송도역과 송도시장을 지나 능허대에 도착하였다. 능허대는 청량산에서 서북쪽 끝자락으로 뻗어 나와 형성된 포구에 있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능허대 터는 공원으로 단장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작은 봉우리 위에 '능허대' 정자만이 이곳이 백제시대의 포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천일보 해상실크로드 탐사취재팀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br>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