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에 대한 차가운 시선 … 색 입힌 뒤 깎는 새 기법 찾아
인천서 꿈 키워왔지만 예술 알아주는 이 드물어 안타까워
▲ 미술가 박기훈은 공존을 꿈꾼다. 작품 속 도시 한가운데 홀로섰던 동물은 이제 가족과 동료가 옆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회화의 소재는 끝이 없다. 작품을 구상하고 기본 골격을 짠 후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 캔버스에 상상 이상이 늘 예술가의 손에서 태어난다. 30대의 박기훈은 인천에서 특별나다. 희소성이 높은 만큼 가치성을 따질 수 없다.

박기훈이 펼치는 예술 세계는 그동안 접했던 작품을 뛰어넘는다. 박기훈이 작품에 담은 의도는 쉽게 읽혀지지만 작품 완성 과정이 녹록지 않았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서른플러스가 만난 박기훈은 폭발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여느 예술가와 다르다. 조용하면서 내면에 담겼을 포텐셜 에너지가 박기훈에게서 아우라처럼 펼쳐 있다.

끊임없는 도전, 그리고 자신에 맞는 화풍을 찾아 일가를 이루는 기염. 말처럼 쉽지 않는 그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가시밭길이지만 반드시 일궈야 한다. 박기훈(38)의 회화는 독창적이다. 그렇기에 박기훈이 갈고 닦았을 미(美)의 여정은 위대하다.

박기훈을 만났다.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작업실을 동료와 나눠 쓰지만 이제 막 빛을 본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기회에 설렌다. 박기훈은 끊임없다. '공존(共存)'의 화두를 찾아 지금도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조각칼로 한땀한땀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 美를 탐하다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 탐닉하게 된다. 동물적으로 예쁜 것에 마음을 쏟는다. 머리보다는 손이 먼저가는 감각적 행위가 시간이 지나며 더뎌지는 것은 아름다움의 탐닉에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부터다. 미술은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만들어 놓은 원초적 행위이다. 그러나 쉽사리 접근하지 못한다.

박기훈이 나고 자란 인천, 그 중 인천의 미추홀구와 중구 일대는 지역을 관통하는 색이 있다. 인천의 바탕이 되는 이 곳에서 뛰어놀던 박기훈이 자연스럽게 미를 추구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일 수 있다.

어린시절 그는 손재주가 있었다. 연필을 들면 뭐든 쓱싹~하고 그려냈고, 색을 입히면 그림이 됐다. '미술에 소질이 있나?' 막연한 생각이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다. 또래들이 주산과 컴퓨터 등을 배우는 학원에 갈 때, 어린 박기훈은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미추홀구 숭의초교를 다닐 때 줄곧 미화부장을 맡았다.

"잘했고, 좋아했고, 즐겼다." 어릴적 박기훈을 기억하는 미술가 박기훈의 말이다.

박기훈은 "미술을 잘하는 것 같은 막연함에 취미로 시작했다"며 "중간에 끊기지 않은 미술 열정이 전공이 됐다"고 밝혔다.

집에서도 그의 소질과 열정에 관심과 응원을 보냈다. '좋아하면 해봐'. 그를 믿어준 부모님은 지금도 든든한 버팀목이다.

"미술을 끝까지 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전 그림을 좋아했던 만큼 미대 입학을 목표로 세워 정말 열심히 했죠. 누구보다 열심히 붓을 들었고, 성적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책과도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서울의 모 대학 미대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원하는 곳이 아니라는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성적이 좋게 나올리 없었고, 목표를 향해 다시 도전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반수'를 했다. 결국 원하는 대학은 합격했지만 이번에는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당시 인천에서 이 학교 미대로 3명이나 갔으면 큰 경사였지만, 막상 박기훈 본인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박기훈은 "어릴 때부터 미술 입시학원에 다니다 보니 그쪽 분야에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많이 도와줬다"며 "후배들이 상도 많이 타고 했는데, 지금도 예전의 경험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기훈은 이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다.


# 행복한 눈물 … 새로운 시작

취업의 길에 들어서려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방송국 일을 준비하던 중, 선배의 조언으로 학과 조교 활동을 했고 석사에 이어 박사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를 놓쳐선 안된다는 운명이 박기훈을 놓지 않았고, 미의 새로움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판화과에 들어갔지만 우리나라에서 판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오죽했으면 선배들이 판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안된다고 했을까요."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1980년대 판화가 각광 받았고, 십 수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로 판화의 세계가 반짝 빛을 봤지만, 그후 판화는 좀처럼 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럴 때 박기훈의 판화 작업이 녹록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박기훈은 새로운 그림법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캠퍼스에 색을 입히고, 이를 깎아내는 기법으로 세상과 조우했다. 판화를 배웠던 경험이 작품의 기본이 됐다. 밝은색으로 시작해 어두운 색으로 깎여내는 작업, 음영의 방식이 판화와 흡사하다.

신선한 이 작업을 인천에 알리기 위해 인천 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개방형 창작공간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체험도 하고, 작업 과정도 살피는 게 좋았다. 미술은 혼자만의 작업이지만, 모두를 위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쉬웠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저녁 불빛을 뒤로 하고 외롭게 서 있는 늑대의 모습, 도시를 한 가득 품고 서 있는 코끼리와 얼굴의 반쪽이 도시 야경으로 작업된 코뿔소의 모습. 지난 7월부터 갤러리 인사이트에서 열린 박기훈의 개인전 '공존'에서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낯선 도시를 그리고, 그 이상한 도시에 출몰한 동물들을 그리고, 궁극에는 그 도시의 주민인 사람들과 동물들과의 공존을 그린다"며 "그리면서 그렇게 공존 가능성을 묻는다"고 설명했다.

또 "작가의 도시 이미지는 회색도시, 무감하고 무정한 도시, 무표정한 도시, 경제적인 키 재기를 전시하는 도시, 물신 도시, 그리고 그 이면에 정작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는 도시를 숨겨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기훈은 "큰 주제는 공존, 같이 잘살자는 것이다. 외할머니댁에서 20여마리 애완견을 키웠다"며 "어릴적부터 강아지, 고양이, 야생동물, 멸종동물 등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됐다"고 강조했다.

북극곰을 그려서 상을 탔다. 발전된 도시 모습과 사라져가는 동물 모습. 도시 안에 동물이 있는 것, 동물과 도시 이미지, 나무가 들어간 작품. "우리가 사는 도시는 회색이지만 이런 환경에서 동물과 공존해야 한다"며, 박기훈은 작품을 전했다.

박기훈은 2004년 대한민국 일러스트 공모전 장려상을 시작으로 2007년 제36회 대한민국 구상전 특선, 2015년 겸재 내일의 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비롯해 국회의사당, 단원미술관, 한국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 공존의 완성은 '동물'

작품에 홀로 선 동물. 도시와 동물, 작품 속 외로움이 가득찼지만 외로운 동물은 더욱 쓸쓸하고 처연함마저 감돌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어우러진 공존을 화두로 삼았지만, 정작 본인의 공존은 아직이다.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며 박기훈의 예술 세계는 외롭지 않았지만, 박기훈의 공존은 미완에 그쳤다. 무얼까. 나의 공존에 빠진 무엇, 바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내 옆자리가 비어있음을 알았다.

2년 전 인생의 공존을 만났다. 작품 속 공존은 홀로 선 동물에서 함께 하는 동물들로 바뀌었다. 도시에 동물은 혼자가 아닌 가족, 동료로 채워졌다.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이 도시와 공존하는 삶은 버겁지만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다.

2018년 작 '공존(1816)'은 파란 하늘 어둠을 이겨내려 애쓰는 달과 도시를 무심한 듯 바라보는 두 마리 동물이 서 있다. 2017년 작 '공존(1744)'에는 길 한복판,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 곰 세마리가 살을 부비고 있다.

2018년 작 '공존(1817)'은 도시와 나무, 그리고 기린 두 마리로 채워졌다. 공존은 버거운 도시 삶에 외로운 예술 작업 속 박기훈과 그의 가족이 함께 한다.

박기훈은 "작업이 외롭게 쓸쓸하게 이뤄졌다"며 "결혼 후에는 공존 메시지가 더 잘 녹아든다"고 했다. "예전에는 혼자라서 작품 속 동물이 혼자였지만 이제는 가족이라는 방식으로 동물이 여럿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은 박기훈의 예술 원천이었던 것이다.

박기훈은 "음악을 했던 아내가 작품 과정을 잘 이해해 준다"며 "세상에 더 많이 작품이 알려질 수 있도록 홍보해주며 더 없이 좋다"고 밝혔다. 물론 작품이 알려지기 전 부모님의 걱정과 주변의 시선이 없던 게 아니다. 그러나 길었던 믿음의 터널이 빛을 보게 된 것은 공존을 놓지 않은 박기훈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안타까움 하나, 박기훈은 "인천에서 작업하기 쉽지 않다"며 "내 또래 중 인천에서 예술하는 사람은 손에 꼽힌다. 타 지역에서는 작품을 알아주지만 인천에서는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