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주말에 벌초를 다녀왔다. 추석을 보름 앞둔 벌초 절기다. 전국의 고속도로에 차가 넘쳐났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주변 산골짝엔 벌초 흔적들이 뚜렷하다. 가슴이 정갈해 오는 초가을의 한 풍경이다. 하루 종일 고향의 이 산 저 산을 훑으며 맡아보는 유년의 기억들도 쌉쌀하다. 몸은 피로에 절어도 달콤한 기분이 남는 세시(歲時)행사다. 그래서 지난 폭염 속에서도 케이블 TV의 예초기 광고는 그렇게 요란했나 보다.
▶씨족 집성촌에서는 한 날 한 시에 모여 합동벌초를 한다. 지역마다 '문중벌초', '모둠벌초', '웃대벌초'라고도 한다. 그 반대가 '가지벌초', '가족벌초', '개인벌초' 등이다. 맨 윗 조상 산소부터 차례로 벌초를 한다. 제주도가 유독 벌초에 엄격하다. '추석 전에 벌초하지 않으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는 말까지 있다. 2004년 이전까지 제주도내 모든 학교에서는 '벌초 방학'을 실시했다고 한다.
▶올해도 연일 정씨 소한문회(門會)의 문중벌초는 입향조(入鄕祖) 산소에서 시작됐다. 배를 타고 영일만 바다를 건너 와 마을을 일궜다는 선조의 묘다. 13대조이다 보니 100명 가까운 벌초일꾼들이 모였다. 동원된 예초기만도 50여 대에 이른다. 8대조 이후부터는 3개파로 갈려 가지벌초에 들어간다. 산소를 따라 서너개 산을 옮겨 다녀야 일이 끝난다. 마을 앞 방파제 식당에서 물회 한 그릇씩 나누면 다시 제 사는 곳으로 흩어진다.
▶벌초 사고도 이어지고 있다. 말벌에 쏘이거나 벌초 나들이 교통사고 등이다. 이들 뉴스에 붙은 댓글들이 좀 삭막하다. '제발 벌초없는 세상을', '뭐하는 겁니까. OECD 국가에서' 이맘때쯤 여성 커뮤니티의 뜨거운 주제도 벌초다. '시댁 벌초 꼭 가야하나요.' 하고 운을 띄운다. '벌초도 며느리 도리라고 하는 어이없는 시댁',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아야', '묘를 이장해 없애 버려야' 등등.
▶1990년대까지만도 벌초 갈등이랄 게 없었다. 고향을 지키는 어른들이 아직 정정하던 시절. "내려올 것 없다. 벌써 다 끝냈다"고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마을을 다 뒤져도 허리굽은 노인들뿐이다. 그래도 조상 묘에 풀이 우묵장성인 꼴은 두고 볼 수 없으니 문제다.
▶벌초는 먼저 간 윗 핏줄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의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 그 명맥마저 위태롭다. 10년 또는 20년 후, 언젠가는 실이 끊겨 바람 속으로 날려간 연처럼 사라져 갈 것이다. 그 때는 '처 삼촌 묘 벌초하듯이'라는 맛깔나는 속담도 잊혀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