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9월의 첫 날, 인천의 밤 하늘도 그렇게 고왔다. 휘영청 밝은 달, 티 없이 푸른 하늘, 거기에 선들선들 바람까지. 이튿날 아침엔 뭉게구름이 끝없이 피어 올랐다. 뭉게구름(적운)은 어촌마을에서 가장 좋아한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다'는 하늘의 신호다.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참에 들려오는 노래가 귓전을 울린다. '구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우리들 마음엔 낙엽이 지고…'( 패티김, '구월의 노래')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 처음 들었으니 반백년을 듣고 있다. 요즘 아코디언을 배운다는 한 선배의 지론이 생각난다. "두고두고 불리는 우리 유행가도 서양음악 클래식의 반열에 올릴만 하지 않는가."
▶'구월의 노래'는 '잊혀진 계절'(이용)이나 '봄날은 간다'(백설희)처럼 계절을 타는 노래다. 가수 이용은 10월 31일 하루 벌어 한 해를 산다고 한다. 시심(詩心)이 얕은 소시민들은 유행가 가사로 계절을 맞이한다. 가을 노래하면 '짝사랑'(고복수)이 먼저다.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가을 강가에서 술잔이라도 기울이는 풍경이 다가온다.
▶원로 작사가 정두수씨는 생전에 '노래따라 삼천리-남인수에서 조용필까지'라는 글을 남겼다. 역시 가을 노래인 '울고넘는 박달재'(박재홍)의 사연도 있었다. 작사가 반야월은 해방 직후 어느 가을, 순회공연 단원들과 박달재를 넘고 있었다. 험한 고개를 넘다가 고물 트럭이 멈춰섰다. 이 때 천등산 마루, 한 젊은 부부의 애틋한 이별 장면을 보게 된다.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한사코 우는고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고단한 서민들에게 계절을 노래한 유행가는 눈물이자 위안이다.
▶박경리 '토지'도 1897년 가을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가을이 오는 조짐을 '길섶의 수풀 속 덤불도 어느새 휑해 져 흙이 드러나 보인다.'고 그려 놓았다. 그렇다. 우리가 폭염과 열대야에 허덕일 때에도 하늘에서는 별자리들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를 받아 땅에서는 수풀 속 덤불도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남녘지방 사투리 '욕봤다'는 "수고했다" "애 많이 썼다"라는 뜻이다. 지난 여름 우리 모두 '욕봤다'. 이제 저 뭉게구름과 산들바람, 오동나무 잎사귀까지, 한껏 가을을 누려보자. 최저임금이든 최고임금이든, 소득주도이든 통계주도이든, 어깨에 힘 좀 빼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