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중심 철학, 도시와 네르비온 강을 살렸다

▲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무덥고 추한 광산도시' 빌바오를 단박에 문화도시로 도약하는데, 큰 역할을 한 빌바오 문화재생의 핵심 아이콘이다. '메탈 플라워(metal flower)', '물고기 비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미술관이 네르비온 강과 함께 하나처럼 어우러져 있다.

▲ 산업시대의 옛 네르비온 강 모습.

▲ 강변쪽에서 바라 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강을 끼고 제조업이 발달했던 유럽의 도시들은 1970년대 산업과 물류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경제가 침체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공장지대와 버려진 유휴공간들은 방치되고 사람들도 도시를 떠났다. 그렇게 몰락한 도시들은 뒤늦게 도시재생, 문화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네르비온 강 주변의 낡은 산업시설을 재생해서, 영국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템스 강변 남쪽 지역의 화력발전소를 재생해서 도시와 지역의 부활에 성공했다.

프랑스 파리의 라 빌레트 공원은 도축장을 파리 최대의 종합공원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포플레노우는 쇠퇴한 공업지역을 재생해 첨단 산업도시로 변모시켰다. 이외에도 독일 에센 지역의 탄광촌과 뒤셀도르프의 티센제철소가 문화예술촌으로, 베이징의 군수공장지대가 다산츠 예술특구로 살아났으며, 일본의 요코하마 역시 근대산업시설의 유산인 공장지대를 집단창작스튜디오나 전시장으로 탈바꿈시킨 지역이다.

이제 이들 지역은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로 꼽히며, 관광 목적지이기도 하다. 문화가 거대 브랜드 파워로 작동하고 있는 현장이고, 문화적 파급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시는 흔히 유기체에 비유된다. 그 도시를 움직이는 힘은 물리적 현상보다는 오랜 시간을 두고 장소에 뿌리를 내린 삶, 즉 문화가 그 결정체이다. 요즘 도시의 재생을 이끄는 강력한 힘으로 문화가 작동하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유럽의 문화재생은 어떻게 진행됐으며,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도시경쟁력을 높이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스페인 빌바오의 도시재생

서유럽 스페인 바스크 자치주 비스까야(Viscaya) 지방의 수도인 빌바오(Bilbao)시는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네르비온(Nervion)이라는 강을 끼고 강철과 조선, 화학산업이 발달한 항구도시이며, 700년 역사를 지닌 스페인 대표 산업도시였다.

하지만 1970년대 산업과 물류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6년에는 실업률이 26%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중공업 발달의 폐단으로 공기, 물, 토양 등 환경오염이 심각하고, 네르비온 강은 생태학적으로 죽은 강이었다.

이같은 산업의 위기와 도시의 쇠퇴, 반환경적인 도시환경, 여기에 고질적인 테러(ETA, Euskadi ta Askatasuna, 바스크 조국과 자유)문제와 대홍수까지 겹치면서 빌바오는 급속히 침체했다.

이에 바스크 정부는 문화정책에 주목하고 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문화산업을 선택한다. 도시의 이미지를 산업도시에서 'post-산업' 도시로 이미지 변화를 시도한다. 문화정책은 지역경제의 다변화뿐만 아니라 사회통합과 투자유치, 이해관계의 조화, 도시와 개인의 자긍심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바스크 정부는 1991년 '빌바오 메트로 폴리-30(Bilbao Metropoli-30)'이라는 기구를 창설하고 21세기에 걸맞는 도시재생 전략안을 수립한다. 공공기관과 민간부문의 대표자로 구성된 민관협력체인 메트로 폴리-30은 △지식기반 산업영역 조성 △구도심 재생 △환경보호 △문화주도 재생을 통한 문화적 정체성 강화 등 4가지 실행 계획을 제시했다. 학자와 전문가 800여명이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와 수질개선, 강가의 공원 계획을 주도하고, 시내와 강변을 잇는 교통체계의 도입 등을 고민했다.

이어 1992년에는 공공자금의 지원을 받는 도시개발공사 '빌바오 리아 2000(Bilbao Ria 2000)'을 창설, 아반도이바라(Abandoibarra) 지역에 관한 플랜을 진행했다. 네르비온 강의 중심이지만 과거에 항구시설과 컨테이너를 위한 철도역과 조선소가 있어서 가장 낙후된 이곳에 주거와 업무, 상업,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 비즈니스센터를 조성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메트로 폴리-30이 빌바오의 비전 수립과 공공, 민간부문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면, 리아 2000은 계획을 실행하는 기관이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치는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는 '구겐하임'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해 옛 산업도시라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현대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도시로 변신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네르비온 강변은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이 아니라 평범한 빌바오 시민들의 운동, 산책, 놀이공간이며, 주민의 사랑을 받는 도시의 핵심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빌바오의 도심을 가로 지르는 강, 네르비온은 이 같은 도시의 흥망성쇠를 기억하며, 오늘도 흐르고 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은 미래도시 빌바오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일명 '구겐하임 효과(Guggenheim Effect)'라고 부를 정도로 침체된 산업도시 빌바오를 일약 문화예술도시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개관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개관 후 1년만에 예상 방문객의 3배에 달하는 연간 관광객 130만명이 몰려들어 1억6000만 달러의 수입을 창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의 독특한 외관이 눈길을 끈다. '메탈 플라워(metal flower)' 혹은 '물고기 비늘'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행기 외장재인 티타늄의 거대한 금속 패널들이 건물 대부분을 감싸고 돌면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외관은 주변의 구획 도로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강렬하면서도 극적인 효과를 낸다. 시간과 날씨, 조명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더욱이 네르비온 강이 미술관의 모습을 투영해 내고 있어 마치 미술관과 강이 하나가 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전체적으로 예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 것에 비해, 작품보다는 건물 자체로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대형 금속물은 빌바오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고, 옛 공장지대는 재생으로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꿨다.

빌바오 도시재생, 문화재생 프로젝트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함으로써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구겐하임'이라는 브랜드는 예술시장분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름 중 하나이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어떻든 빌바오는 단박에 문화예술도시의 대열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지방정부 주도의 탑 다운(top-down) 방식과 지역사회로부터 의견수렴과정의 생략과 지지의 결여는 민주사회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대형프로젝트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이다. 더욱이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 중 하나라는 사실은 미술관의 차별화를 이끌어 내고 고유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 구겐하임 미술관은 빌바오 문화재생의 핵심이며, 바스크 지방 전체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가 '무덥고 추한 광산도시'로 묘사한 빌바오가 산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도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빌바오 도시재생의 성공비밀은 주민의 보행권과 지역사를 중시한 주민중심의 철학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빌바오 시청 도시계획국장은 "구겐하임 미술관은 빌바오를 국제화하는 데 역할을 한 것뿐이며, 빌바오의 도시재생은 수많은 프로젝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구겐하임 효과로 불리는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압도적인 랜드마크가 빌바오의 부흥을 불러온 것은 아니라,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함께 진행됐다는 것이다.

기자가 찾은 빌바오는 관광객과 전시 관람자가 뒤섞여 발을 딛고 서 있을 틈조차 없는 미술관보다는, 시민들이 휴식을 즐기는 네르비온 강변의 산책로가 있기에 더욱 빛나 보였다. 네르비온 강변은 주민들이 걷고 뛰고 사색하는 거대한 문화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빌바오=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