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다시 서는 '오뚝이'처럼 지역에서 기업 일군 '기계의 달인'
▲ 서구 가좌동 사무실에서 만난 최광은(57) ㈜케이앤제이텍스타일(K&J Textile) 대표이사. 그는 "인천에서 기업을 운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며 웃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서구 가좌동에 위치한 ㈜케이앤제이텍스타일(K&J Textile) 공장에서 최광은 대표이사가 공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판로 부재·대금 사기·사고 역경 딛고 '100억원대 매출'
"지금도 현장 전문가로서 할 일 해"…아너 회원 가입도

 

기계를 만지는 손에선 기름이 마를 날이 없었다. 분해하고, 부품을 깎고, 조립하고, 다시 돌리는 인생이 반복됐다. 실패는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뿌리를 한 번 제대로 내리자 탄탄한 중소기업을 키울 수 있었다. 최광은(57) ㈜케이앤제이텍스타일(K&J Textile) 대표이사는 기술자 출신이다. 1970년대 백령도에서 자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뭍으로 건너와, 직장과 야간학교를 함께 다니며 기계를 배웠다.

"기계를 만져보니 사업도 쉽게 할 줄 알았죠. 기계를 얼마나 돌리면 수익이 얼마나 난다, 이런 계산이 있었거든요. 현실은 생각이랑 틀렸어요. 실패도 많이 했고요. 지금은 지역에서 기업을 운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그는 이불솜과 침대 부자재를 만들어 유명 브랜드에 납품하고 매년 100억원대의 매출을 거두고 있다. 직원 35명이 함께 한다.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의 회원이기도 하다. 인천에서 기업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들어봤다.


▲실패와 성공 거듭했던 기술자의 삶
그가 첫 사업에 뛰어든 때는 산업화의 시대인 1981년. 군대를 다녀온 그는 일찌감치 시작한 직장 생활과 기계 공부로 현장을 잘 아는 편이었다고 한다. 기계를 하루 돌리면 수익이 얼마나 날지 눈에 보였다. 기계를 다루는 자신의 기술도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시작한 첫 사업은 누비(퀼팅)였다.

"사업주들이 기계를 돌리다가 고장 나면 일본에서 큰돈을 주고 기술자를 불러오더군요.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원단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직접 봤고요."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만드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 판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사업은 결국 실패했다. 두 번째 사업 기회도 금방 찾아왔다. 그는 1983년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인이 자신들의 기계를 봐주는 조건으로 월세도 받지 않고 공장 자리를 내줬다. 이번에는 판로도 확보했다. 국내 대기업에게 하청 받은 사업가가 재하청을 주겠다고 제안하면서 기회가 생겼다.

"당시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은 분이 저에게 재하청을 주겠다고 했어요. 내가 물량을 다 소화하겠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그런데 몇 개월 지나니 그 사람이 전화를 안 받더군요. 당장 사무실로 뛰어갔는데 사라지고 없었어요. 물건은 넘겼는데 대금을 못 받았죠. 손해 본 돈이 2000만원 정도였어요. 지금 가치로 따져도 막대한 돈이죠."

사라진 이를 찾아봐도 소용은 없었다. 사무실에도 이미 압류 딱지가 잔뜩 붙은 뒤였다. '사업은 안 될 모양이다'라고 생각한 그는 직장에 다니기 위해 면허까지 땄다. 그런데 상황이 갑작스럽게 달라졌다. 대기업 집안의 한 친인척이 자신에게 납품을 부탁했다. 땅도 있고, 기계도 있었다. 사업은 안정적이었다. 금방 돈이 됐다.

"일단 등기부터 보자고 했어요. 또 속을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선금 1000만원을 주면 빚부터 좀 갚고 시작하겠다고 부탁했죠. 바로 받았어요. 그렇게 사업을 1년쯤 하다가, 1984년 5월쯤 빚을 다 갚고 정리했어요."
세 번째 사업을 정리하니 수중에는 700만원 정도가 남았다. 이제 쉬고 싶었지만 사업에 대한 마음을 쉽게 접긴 어려웠다. 결국 곧바로 네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기계를 11대까지 늘렸고, 집도 사고, 공장도 샀다. 이후에도 어려움이 없진 않았다. 이불과 침대에 들어가는 부직포로 업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계가 말썽을 부려 1년 넘게 기계를 돌리지 못하고 망했다는 소문까지 날 때도 있었다. 간신히 기계를 고쳐놓으니 직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신소재로 제품을 만들고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지금은 서구 가좌동에 생산기계 5대를 두고 안정적으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서 제작도 간단합니다.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면 딱 떨어지지요. 지금도 기계를 보며 살아요.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은 빌리지만, 현장 전문가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요."

▲잠자리 따뜻함 지켜주는 '코지 필(Cosy Feel)' 생산한다
코지 필은 지난 2015년 내놓은 브랜드다. 깨끗하고 아늑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케이앤제이 텍스타일이 생산하는 상품들은 대부분 '코지 필'이 붙어 납품되고 있다.

"회사 이름은 예전 이름인 광진실업에서 이름을 따 케이앤제이텍스타일로 영업하고 있어요. 대신 상품은 독자적인 브랜드 '코지 필(Cosy Feel)'로 나가고 있죠."

들어가는 곳은 각양각색이다. 이불이나 침대를 비롯해 자동차, 토목, 비닐하우스 등 우리 생활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는 특히 유명 침구 브랜드에 많이 납품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생산품 중 아웃라스트(Outlast) 섬유를 내세웠다. 쾌적한 온도를 자체적으로 유지하는 섬유로,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의 우주인을 위해 개발된 소재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기능성 소재이기도 하다.
"아웃라스트는 이불 제품에 들어가고 있어요. 체온을 일정하게 보호하는 소재라 고급 제품에만 들어가죠."

▲"인천에서 많은 일 해봐…지역에 감사"
기업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단지 이윤 창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른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인들을 항상 긴장시킨다. 기업들이 영리 추구를 넘어 지역과 함께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요즘 들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최 대표이사도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지난 2016년 12월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고향도 잊지 않는다. 그는 모교인 백령중학교의 재경인총동문회 회장도 맡고 있다. 대표이사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각종 표창장과 감사장은 지역에서 왕성하게 봉사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했다. 그는 인천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사실 그리 활동적이지 않아요. 동문회도 동네일이라 무작정 뺄 수 없어서 하고 있지요. 2014년부터 벌써 5년째네요. 인천에서 많은 것을 해봤어요. 사업가로서 흐름을 잘 탔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역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인천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천이 앞으로 더 발전할 텐데, 저희 회사도 계속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