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우리나라에서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07년 이래 111년 만에 찾아온 올 여름 폭염은 역대 최고기온, 폭염 및 열대야 일수 등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불볕', '땡볕', '가마솥', '찜통', '살인적', '역대급'이라는 폭염을 나타내는 단어가 신문 지면이나 방송 보도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한다.
올 여름 폭염으로 온열질환자가 지난 10일을 기준으로 전국에서 3500여명 발생했으며, 사망자는 50여명에 달한다. 돼지, 닭 등 가축 폐사가 500만 마리 넘었으며 넙치와 전복 등 어패류 120만 마리와 농작물도 1965ha에서도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폭염이 언제쯤 한 풀 꺾일지', 요즘에는 사람마다 온통 기상 예보에 관심을 쏟는다.
우리 삶과 문화도 폭염에 맞춰 바뀌어 가고 있는 듯하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북적이던 전국 유명 해수욕장이나 산과 계곡 등 관광지들이 올 여름엔 낮에는 폭염, 밤에는 열대야로 관광객들이 급감하면서 상인들이 울상을 짓는다.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는 방문객이 지난해보다 90% 가량 줄어 '재난'이라는 말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다.
반면 기록적인 폭염에 전통적인 피서방법 외에 에어컨 바람을 즐기기 위한 이른바 '~캉스'가 신조어로 유행하고 있다.
호텔로 피서를 떠나는 '호캉스'는 이미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등에서 더위를 식히는 '몰캉스(mall+바캉스)',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피캉스', 시원한 곳에서 독서를 즐기는 '북캉스', 찜질방에서 피서를 즐기는 '찜캉스' 등 '바캉스'에서 파생한 다양한 신조어가 눈에 띈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커피서'를 즐기는 사람도 늘었다.
초·중·고생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시원한 영화관을 찾는다거나 심야영화를 즐기는 직장인도 부쩍 잦아졌다. 공연장이나 전시장에서 여유롭게 더위를 피하는 관객들이 많아진 점도 폭염이 바꿔놓은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맥주·빙과·음료 업체들은 제철을 만나 매출 목표를 늘렸고, 선글라스·양산·샌들 등 여름 용품도 매출이 급등하고 있다. 에어컨·선풍기 등은 짧게는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로 품귀현상마저 빚는다고 한다.
이밖에 체온유지를 위한 쿨스카프, 쿨토시, 쿨조끼 등 쿨링제품의 수요가 급증하고 얼린 과일도 인기를 끈다. 불을 이용한 조리가 필요 없이 전자레인지에 데워 바로 먹을 수 있는 간편식도 '폭염 특수'를 이어가고 있다. 공직 사회와 일반 기업에서는 남성들의 반바지 출근이 논란을 빚는가 하면, 강한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는 현상마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은 신비롭기까지 해서 불과 6개월 전인 1월 말에 경기 연천지방이 영하 27.3도였고, 8월 1일 경기 광주에서는 영상 42.1도를 기록했다. 반년 사이에 연교차가 무려 69도를 넘었다. 최저·최고 기록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를 보면 보통 영하 15도는 자주 있는 일이고, 여름 기온은 영상 35도를 웃도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니 연교차 50도는 이제 해마다 겪어야 할 연례행사로 치부될 전망이다.
이제 곧 말복(末伏)을 넘어 처서(處暑)가 지나면 폭염도 수그러들겠지만, 이럴 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이 8가지 운치 있는 피서법을 멋진 시로 남긴 '소서팔사(消暑八事)'를 따라 해보거나 상상만이라도 해보자. 그러면 옛 선비의 지혜로 더위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으리라.

'송단호시(松壇弧矢) 솔밭 둑에서 활쏘기/ 괴음추천.느티나무(회나무) 아래에서 그네타기/ 허각투호(虛閣投壺) 텅빈 정각에서 투호놀이 하기/ 청점혁기,서늘한 대자리 깔고 바둑두기/ 서지상하(西池賞荷) 서쪽 연못의 연꽃 구경하기/ 동림청선(東林聽蟬) 동쪽 숲속에서 매미소리 듣기/ 우일사운(雨日射韻) 비오는 날 한시 짓기/ 월야탁족(月夜濯足) 달밤에 개울가에서 발씻기' <'소서팔사(消暑八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