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구걸(求乞)은 돈이나 곡식 등을 거저 달라고 비는 행위다. 요즘에야 흔치 않은데, 뜬금없이 며칠 새 논란거리가 됐다. 단초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발언. 나라의 경제부총리와 재계 일인자 만남이 '구걸'로 비칠 수 있다는 거였다. '설'은 삽시간 널리 번져 두 사람의 만남은 '구걸하는 자와 베푸는 자' 관계로 비쳐졌다.
어찌됐든, 구걸논란이라는 불편한 환경에도 두 사람은 지난 6일 평택 반도체공장에서 만났다. 공식적으로 밝힌 대화에 투자나 고용 관련 내용은 없었다. 앞서 방문한 현대자동차나 SK 등 대기업 현장 방문 기조 그대로였다.

괴이한 건 다른 대기업 방문 때 잠잠했는데, 유독 삼성 반도체공장 첫 방문에 앞서 구걸론이 들불처럼 번졌다는 거다. 상당수 언론들도 익명에 잇대 호통 치며 구걸을 확대 재생산하려 애썼다. 이해하기 어려운 언론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있자면 문득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장충기 사장에게 수많은 언론인들이 보낸 애절한 문자메시지가 떠오르는데, 그거야말로 구걸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들 언론의 '구걸 프레임'에 다수 국민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김 부총리는 대기업에게 투자와 고용을 요구하는 게 옳다고 본다. 합리성을 잃은 구설수가 두려워 기피하는 태도는 비겁해 보인다. 장기간 정체된 경제상황과 좀체 늘지 않는 일자리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47개 대기업 금고에는 158조9408억 원의 현금이 쌓여있다. 이 중 삼성전자 보유현금은 32조3038억 원으로 1위다. 불과 일 년 만에 7.8%, 11조5642억 원 늘었다. 가파른 증가세다.

사실 이렇게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에 정부가 나서 투자나 고용증대 협조를 요청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굳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들지 않아도, 과거 정부 때도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뿐인가. 문 대통령도 지난 달 인도에서 이재용부회장을 만나 "투자 많이 해 달라"했지만 논란은 없었다. 그런데도 감정 뒤섞인 자극적 프레임으로 한 건 올리려는 일부 언론이나, 그런 언론 눈치 보느라 할 말 못하는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이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