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제 강점과 8·15해방, 한국전쟁, 4·19혁명, 월남전,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질곡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가 바로 60세 전후의 한국인 들이다. 나라가 어렵다 보니 혜택은 없고 무조건 육신을 바쳐 봉사해야 했던 세대…

 강광교수 역시 이러한 불공평한 질서 속에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었던 전전(戰前)세대 중 한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대학시절에 4·19에 참여했으며, 대학 졸업후 월남전에 끌려가 이국(異國) 내전의 고용병 생활을 해야 했던 강광은 제대후 홀연히 제주도로 내려간다. 그가 어릴 때 보았던 한국전쟁에서의 동족간의 살육현장, 도덕성이 결여된 정권에 복종해야 했던 경험, 피아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 단지 살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등은 젊은 강광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을 요구했다.

 아무 연고 없이 홀홀단신 제주도에 내려간 강광은 일단 시교육청에 찾아가 미술교사를 자원하여 제주 오현고에 부임하게 된다. 이때 강광선생에게 미술을 배운 학생들은 강요배(서양화가·현실과 발언 동인), 김영호(중앙대교수·미술평론가), 강승희(추계예대교수·판화가) 등이었다.

 강교수가 습작기라고 말하는 제주 생활 14년은 유신정권하의 암울한 현실을 그의 정신속에서 추스리고 아우르고자 하는 기나긴 사유의 도정이었다. 이런 장시간의 습작기는 그의 작품을 한 차원 높은 형상세계로 이끌어 준 힘이자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을 보게되면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자연과 현실을 그만의 독특한 색채로 해석하는 방법이 잘 나타난다. 당시 그의 그림에서는 기탁할 육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과도 같은 인간과 황량한 자연의 단상들은 인간의 존재와 현실에 대한 되물음이라는 본질적 화두를 던져준다. 이는 지나간 시절의 아픈 기억들에 대한 넋두리라기 보다는 가난과 억압에 고통받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고발이자 반항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제주대 미술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강요배, 고영훈 등과 함께 「관점」이라는 미술단체를 결성하여 제주 미술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때 대학시절의 은사였던 유경채(제1회 국전 대상 수상자)교수가 찾아와 「이제 그만 올라가자」고 종용하여 14년간의 제주생활을 청산하고 일단 인천으로 올라온다. 한편, 1983년 강광은 유경채교수와 함께 진화랑 「유경채·강광 2인 초대전」을 열었다. 이는 양자가 스승과 제자 관계라는 측면에서 뿐 아니라 유경채화백이 좀처럼 사적인 전시에 출품하지 않는다는 다소 특이한 이력 때문에 많은 주목을 끌었다. 아울러 이 전시는 그가 제주시절에 그린 그림의 전모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팸플릿 서문에서 미술평론가 임영방교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는 강화백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하여 보여주는 세계는 이중의 현실성이다. 그것은 일상성과 항상성이다. 사람은 그 어느 하나에 치우쳐 살고 있다. 강광은 양면성을 시각화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사색으로 이끌어 준다<&28137> 따라서 작품은 서술적 양상을 멀리한 형상위주이며 일상적 현실의 허구와 잔영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변화의 현실에서 불변의 현실인 인간의 탐욕이 여러 상태로 암시되고 있다. 때로는 한 송이의 꽃으로, 때로는 한 조각의 과실로 아니면 동물의 잔해로 보여준다. 작가의 구상은 대상의 본질적인 요소만 제시하고 설명적이고 수식적이며 감각적인 면을 완전히 배제하여 새로운 현실로 접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그의 그림은 모더니즘의 궤적 안에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었다. 사실 모더니즘을 기본항으로 인식하고 그 개념의 애매성과 복잡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실천적 대안으로 리얼리즘의 위상을 상정할 때 강광의 작품세계는 이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강광 교수는 194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그가 경복중·고를 거쳐 서울미대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종양으로 작고하게 되는데 이미 3년간 투병 중에 네번의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가산이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이때부터 강광의 학창시절은 좌절과 역경이 순환적으로 반복되었고, 등록금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거듭한 끝에 6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서 젊은 강광은 그림과 이의 존재 방식, 현실과 이상, 인간과 소외, 작가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가난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젊고 나약한 그에게는 다소 벅찬 심오한 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고심하고 괴로워해야 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제주의 지역작가로 강요배, 고영훈 등과 함께 그곳의 타성적 유미주의를 극복하고 실천적 미학논리를 앞세운 전람회를 주도하던 강광은 1976년 창작 미협전에 출품하면서 비교적 뒤늦게 중앙화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 그는 「오늘의 작가전(문예진흥원)」, 「현대미술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한국 미술전(프랑스)」, 「아시아 국제 미술전(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한국 정예 작가전(일본)」 등에 초대 출품하면서 그의 독자적 작품세계를 국내외에 확고히 인식시키게 된다. 1984년부터 인천대학에 재직하게 되면서 강광교수가 이 지역의 문화계 안팎에 끼친 영향력은 중차대하다. 파행적으로 운영되던 선인학원의 시·공립화는 그가 인천대학의 교수협의회 회장을 하면서 주도한 결실이다.

 또한 그는 굴업도 핵 폐기장 건설 반대운동 공동대표를 하면서 환경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인하대 이가림교수와 함께 인천 민예총을 섭립시켜 예술계를 예총·민예총 양대 체제로 정립시킴으로써 서로 보완·견제하는 상태에서 한쪽의 일방적 전횡이나 독주가 불가능하게 하였다.

 현재에도 그는 인천 미술인 협의회 지도위원으로, 인천 참여연대 자문위원으로 지역문화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으로써 소임과 도리를 수행해나가는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이 지역에서 갖는 위상은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후학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인 평면회화를 고집하고 있는 그가 「영상미술제」와 같은 첨단 매체 미술전람회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수업하는 점이나 「월미도 행위 예술제」세미나 등에 관객으로 자리하여 끝까지 발표자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점등은 교육자로서의 자세와 함께 그의 겸손한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일요일인 오늘도 그리고 있는 80호짜리 작품을 완성하든지 아니면 때려부수든지 양자택일의 상태에 있다고 「천상 화가」의 모습을 보이며 작업실 쪽으로 차를 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