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의 마음산책] '대중일보의 얼', 그 언저리에서
[이문일의 마음산책] '대중일보의 얼', 그 언저리에서
  • 이문일
  • 승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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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인천은 우리 수도의 관문이며 동시에 공업산업의 심장부인 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융성할 것이니 국가와 함께 본지가 같이 성장하면서…"
"…인천항이 이제 새 시대 해외 제국과 교섭하는 문호가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귀 신문이 해야 할 정치적·문화적 역할은 자못 중대하다…"-시인 임화
"…신문의 존재 이유는 정확하고 신속한 보도와 공정한 여론의 반영에 있다…"-지역원로 신태범
1945년 10월7일 광복 직후에 선을 보인 '대중일보(大衆日報)'의 창간사와 창간축사다. 대중일보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천 언론의 효시(嚆矢)이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지방신문이다. 해방 후 인천시민 손으로 만든 명실상부한 인천 언론의 첫 시작이었다. 대중일보는 그동안의 식민지 설움에서 벗어나 '펜'으로서 세상을 밝히고자 했다. 대중일보는 '민족 반역자 처단'을 내세웠고, '해방운동 36년사'와 윤봉길·이봉창 등 '3열사 추념기' 등의 연재를 통해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데 앞장섰다. 창간 초기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이란 캠페인성 기사를 싣고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한글 반포 오백세돌 날에는 제목을 포함한 모든 지면을 한글로 제작하기도 했다.

왜 이제 와서 대중일보를 거론하는가. 인천지역 언론의 '계보'를 밝히고 그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에서다. 모든 사안의 본질을 알기 위해 기원(紀元)을 밝혀야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에선 오랜 전통이다. 대중일보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인천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모두 힘들어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대중일보 창간사와 축사는 자못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를 설정해 주는 듯하다. 인천 언론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작업은 인천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대중일보는 인천에서 인천인들이 처음 국문으로 만든 신문이었다. 한문이 많았지만 문장을 이루는 기본틀은 우리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의 독자적 언론을 세우자는 열망이 가득했던 때였다. 이를 반영하듯 대중일보 창간은 서울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복간보다도 빨랐다.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천의 첫 신문은 1890년 1월28일 창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였다. 그 후로도 여러 신문이 인천에서 발행됐지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들을 위해 존재한 신문이었다.

대중일보는 창간과 함께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내다가, 1950년 1월1일자부터 오늘날 신문과 비슷한 배대판으로 바꿨다. 대중일보는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발행을 중단했다가, 석 달 만인 9월 19일 종전 대중일보 시설과 인원을 중심으로 제호를 '인천신보(仁川新報)'로 바꿔 발간했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발행을 하던 인천신보는 53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신문을 만들었다. 인천신보는 57년 7월19일 '기호일보(畿湖日報)'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60년 7월7일 '경기매일신문(京畿每日新聞)'으로 제호를 변경해 문을 연다. 경기매일신문은 73년 8월 말까지 13년간 발행됐다. 인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이었다. 인천의 언론사는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이란 계보를 이룩한 셈이다.
경기매일신문은 그러나 1973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100만에 가까운 인구가 사는 인천에 터를 잡고 27년간 9018호의 신문을 발행했던 인천의 유력지가 군사정권에 짓밟혔다. 유신정권은 '1도(道)1사(社)'란 언론통폐합을 단행한다. 말을 안 듣는 언론인들에겐 '채찍'을, 순순히 협조하는 언론인들에겐 '당근'을 주겠다는 의도였다. 결국 진보적 색채를 지녔던 경기매일신문은 수원의 '연합신문'에 흡수된다. 이때 인천 언론의 한 줄기인 '경기일보'도 함께 통폐합된다. 인천의 2개 언론사를 흡수한 연합신문은 '경기신문'으로 개칭하며 73년 9월 1일 창간호를 발간한다. 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해 경기도에서 분리된 후 2차 언론통폐합에 따라 경기신문은 82년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지금까지 발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언론에 재갈을 물린 시기를 벗어나 마침내 다시 인천에서 인천인들이 만드는 '인천일보'(창간 당시 仁川新聞)가 탄생했다. 1988년 7월15일이었다. 당시 창간은 6·10 민주항쟁에 굴복해 정부가 시행한 '언론자율화'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인천일보 창간 전까지는 인천에 인천을 대표하는 신문이 없었다. '언론 암흑기'였다. 지역 원로 언론인들은 따라서 인천일보 창간은 창간이 아닌 '복간'으로 해야 맞다고 했다. 인천인들을 주축으로 발행하다 73년 강제로 통폐합된 경기매일신문 후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천일보 창간 때 경기매일신문 지령을 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대중일보-경기매일신문-인천일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어느 신문이 대중일보 창간일과 경기매일신문 지령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인천언론사'만 봐도 그 사실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인천일보가 엊그제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창간호를 내고 인천시민들과 환호성을 울렸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서른 살을 넘겼으니 감회가 정말 새롭다.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숙명으로 아는 우리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 이제 '인천의 독립신문'이었던 대중일보의 얼과 줏대를 이어받아야 한다. 그래야 지역 언론의 참뜻과 정통성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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