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주년 발자취] 30년을 바꾼 '직필'
[창간 30주년 발자취] 30년을 바꾼 '직필'
  • 김진국
  • 승인 2018.07.13 00:05
  • 수정 2018.07.13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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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언론 암흑기 깨고 태동
대중일보 맥, 정통지 '인천신문'
90년 7월 인천일보로 제호 변경
초기엔 납 활자 조판 신문 제작
92년부터 12→16면 확대 발행
94년 새사옥·2000년 20면 조간
▲ 인천일보 창간 당시 사옥
▲ 1988년 7월15일 인천신문 창간을 축하하며 임직원들이 사옥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인천신문 창간 당시의 신문 로고.
▲ 인천일보 주최 미스인천 선발대회.
▲ 미스인천 선발대회 초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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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9월19일 최기선 인천시장 사퇴를 긴급 타진한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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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이드 판형 제작된 주말판 신문 '선데이 인천' 1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그러니까 1988년 인천에선 '대사건'이 발생한다.

1973년 군사정권의 전국적 언론 길들이기 정책인 '1도1사'(정부가 1개의 도에 1개의 신문만 허가) 제도가 폐지되고 '언론자율화'가 실시되면서 15년간 언론암흑기였던 인천에서 인천일보가 창간한다.

1987년 '6·10항쟁'의 결과 당시 정권은 '6·29 선언'을 해야 했고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언론자율화'에 따라 인천·경기를 대표하는 언론이 탄생한 것이다.

인천일보의 탄생

6.29선언 이후 인천에선 인천상공회의소 회원사들을 중심으로 신문사 설립이 구체화됐다.

당시 '경인일보' 주주의 반을 형성하고 있던 15명의 인천 주주들은 1988년 4월 25일 '주식회사 인천신문(후에 인천일보로 개제)'의 등록 인가를 받고 같은 해 7월 15일 마침내 창간의 깃발을 올린다.

'대중일보'의 맥을 이은 정통 인천지역언론의 탄생이었다. '인천신문(仁川新聞)'은 초대 대표이사에 문병하(文炳河) 한염해운(주) 사장을 선임하고 옛 경인일보 인천분실 사옥을 사용했다.

일본 스미모토사의 고속 컬러 윤전기를 마련하고 매일 12면, 석간으로 발행하던 '인천신문'은 1990년 7월 창간 2주년 때부터 제호를 오늘날과 같은 '인천일보'(仁川日報)로 변경하고, 1992년 3월 2일자 부터 매일 16면을 발행하며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다.

당시 인천일보가 사용하던 건물은 일제 강점기 '인천곡물협회'로 사용한 2층 건물이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보니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요란했고 여름에 한증막, 겨울엔 냉동고를 연상하리만큼 실용성이 떨어졌다.

요즘 같은 한여름이면 대형 플라스틱 대야에 얼음을 둥둥 띄우며 펜을 잡아야 했던 모습이 편집국의 풍경이었다.

서울 지역 신문들이 전산 시스템을 도입하던 시기, 인천일보는 60년대 연활자 방식을 고수하면서 출발했다.

주조실에서는 납을 끓여 활자를 만들어냈고, 문선실에서는 글자 수대로 활자를 뽑아내 조판(組版)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그런 수공업적 제작 형태는 곧 CTS(컴퓨터조판시스템)로 전환됐고, 몇 년 뒤 수십억원을 들여 윤전기를 최신식 초고속 칼러기로 바꾸었다.

창간한 지 몇년 지나지 않은 94년 옛 건물을 '한진'에게 넘기며 대토로 받은 지금의 자리에 신축건물을 세운다. 2000년 7월엔 석간시스템을 조간으로 바꾸고 20면의 지면을 지금까지 발행해오고 있다.

#인천일보가 걸어온 길

창간 이후, 인천시민의 뜨거운 애정을 한몸에 받은 인천일보는 '애향심 제고, 공동체 구축, 독자성 창출, 공정성 견지' 등 4개항 (社是)을 사시로 삼고 정론직필의 길을 걷는다.

인천·경기지역의 언론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세우고 기자를 비롯한 전 사원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정신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복지·환경 등 지역 사회 전반에 걸쳐 독자의 '알 권리' 보장과 행정의 감시와 비판, 조정 등에 가치를 두고 사회정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일보의 정론직필은 한국기자협회가 시상하는 '이달의 기자상' 수상에서 입증했다.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특정산업폐기물 불법 매립,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 사건, 고잔동 유리섬유 불법 매립 사건,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환경오염에 중병 앓는 서해안 섬, 바닷모래 해법, 정부가 나서라, 인천공항 입국 비리사건, 금융기관 직원 지방세 황령 사건, 수도권 매립지 10년, 비극은 시작됐다, 뉴코아 아울렛 '암구호 방송은 거짓말' 등등 인천일보의 특종 기사들이었다.

이밖에 경찰 대형 새총으로 조준 공격, 인천시 교통카드 롯데그룹 특혜 의혹 연속보도, 사상 최대 규모의 KT&G 면세 담배 밀수사건, 천대미문의 신종 마약 '카트' 밀수사건 등 인천일보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언론사로서 인정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오광철 주필의 능허대, 신태범 박사의 풍물산책, 먹는 재미 사는 재미, 컬럼이스트 신용석 선생의 신용석 컬럼, 조우성의 미추홀, 김학준 박사의 월요논단, 시리즈 기획물 인천인, 현대 인천 인물사, 연재 컬럼 월미만필, 하와이 이민90년사, 지면으로 보는 인천경제사, 연중 교육 캠페인 등과 인천정보센터(인디텔) 설립, 인천도서100년전 개최, 인천ㆍ산동수체화전 개최,국보급 문화재 청사 김재로의 전신좌상 발굴, 영종ㆍ용유도 편입 캠페인, 굴업도 핵 폐기장 저지, 마지막 정신대 캄보디아 훈할머니 고향 찾기, 인천국제공항 명칭 개명 반대, 인천책 30cm서가운동, 인천을 자전거 타는 도시로와 같은 행사, 캠페인, 기사들은 독자에게 인천일보의 공신력을 높여주었다.

2000년대 들어 인천일보는 지역의 역사문화에 천착하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인천과 경기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고도로서의 강화도를 조명했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를 비정하는 등 역사바로잡기에도 일정부분 성과를 이뤄냈다.

기획기사와 함께 인천 경기도의 정체성을 조명한 책만도 <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 뜨다>, <정조의 혼 화성을 걷다>, <천년의 얼 대장경 향기를 따라>, <인천 세계 활자의 시대를 열다> 등 여러 권에 이른다.

인천일보의 역사는 그러나 영욕이 교차된 가시밭길이기도 했다.

인천ㆍ경기 지역 언론의 선두주자였던 대중일보(大衆日報)의 맥을 이은 정통지로서 사회적 채무를 다하기에는 주어진 여건들이 녹록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자본을 바탕으로 한 메이저 신문의 물량 공세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지역언론들 사이에서 인천일보는 무책임한 경영진과 간부진, 그에 따른 노사갈등, 일할 의욕을 상실해가는 직원들로 인해 여러 고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3년 간의 법정관리를 받아야 했던 인천일보는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경영진이 경영을 승계하고 '부영'이라는 재계 16위의 대기업이 최대 주주로 들어오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아왔다.

/글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사진 조우성 전 일천일보 주필

▲ 인천일보, INCHEON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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