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월드컵 한국 팀의 불운과 '라커룸 눈물'에 뜬금없이 '경평축구'를 떠올렸다. 물론 내게 경평축구의 추억은 없다. 그저 이어져온 말과 글로 겨우 더듬어 볼 뿐이다.

경평축구는 한반도 최초 축구 더비(Derby Match)다. 첫 경기가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시작됐다는 점도 뜻 깊다. 그해 휘문고보에서 사흘간 치른 경기의 관중은 약 7천명. 이듬해 2회에는 연일 2만여명이 몰렸다. 열기가 뜨거워 불상사가 속출했고, 이후 대회는 막을 내렸다. 3년 뒤인 1933년, 경평축구는 되살아났다. 봄과 가을,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겨루는 '진정한 더비'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3년만에 중단됐다. 일제 탄압에 따른 두 번째 좌절이다.

1946년 해방공간에서 잠깐 되살아났지만 사실상 마지막 경평축구가 됐다. 대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떠나는 북녘선수들은 '곧 평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마냥 미뤄지고 있다.
그 틈새는 이따금 유사(類似)상품이 메꿨다. 첫 상품은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이란 정치적 산물로, 1990년 10월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다. 서울-평양을 오가 나름 경평축구 취지를 담았다. 2002년에도 박근혜가 김정일에게 제안해 같은 이름의 경기를 그 해 9월 열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도 '8·15 민족대축전'이란 남북축구경기가 벌어졌다. 상암경기장에는 한반도 기(旗)가 올랐고, 붉은 악마들은 '통~일 조국'을 외쳤다.
이처럼 경평축구를 앞세운 남북 축구교류는 긴 세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축구공처럼 예측 불가,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남북관계는 멀고 가까워지길 되풀이해 왔다.
마침 한반도에 다시 불어닥친 평화바람에 경평축구 부활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정치권이 앞 다퉈 내놓는 카드다. 오늘의 남북 관계를 연 게 평창 동계올림픽이듯 체육 분야, 특히 축구야말로 써먹기 좋다. 그래서라도 궁극적으로 남북 각자 '반 쪽'이던 팀이 '원 팀(one team)'으로 된다면, 다시 눈물 흘리는 일 없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