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위원
인천이 '호국의 도시'로 떠오른 건 고려시대가 아닌가 싶다. 고려는 1232년 몽골제국에 맞서 수도를 인천 강화도로 옮긴 뒤 39년간 항전한 '강도(江都)시기'를 통해 국통을 보존했다. 조선시대엔 병인(1866)·신미양요(1871)를 겪으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 조선군의 희생은 컸으나 병인·신미양요는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서양의 함포 몇 발을 맞고 항복했지만 조선은 달랐다. 관군은 물론이고 의병·승병과 호랑이를 잡던 범포수들까지 똘똘 뭉쳐 최신 서양무기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패전한 프랑스군은 화풀이로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주요 왕실서적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려의 성곽, 조선의 돈대는 인천이 호국·보훈의 도시란 사실을 방증한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란 사건을 겪으며 격랑에 휩싸인다.

1950년 12월18일 인천에선 중·고등학생들이 교복을 벗고 군복을 입는다. 소맷자락이 손을 뒤덮는 군복과 자신의 키 만한 총을 든 앳된 얼굴의 소년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며 학교 대신 전쟁터를 선택한 것이다. 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축현초등학교에 모인 3000여명의 소년들은 20일을 걸어 훈련소가 있는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휴전이 된 1953년까지 4년간 전쟁을 치른다. 이 기간, 전사하거나 부상자가 되어 집에 돌아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중에 '이규원치과' 이규원 원장의 부친 이경종(85)옹도 있었다.

당시 소년 이경종은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누가 알아주길 원한 건 아니었으나 4년 뒤 돌아온 고향엔 아무 것도 없었다. 상심속에 살아오던 이 옹은 96년 12월부터 친구들의 모습이 담긴 빛바랜 사진을 모으기 시작한다. 혼자만이라도 인천 학도병들을 기억하고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23년이 흘렀다. 줄곧 아버지를 돕던 이규원 원장은 2004년 '인천학생 6·25참전관'을 설립해 박물관으로 위상을 높여 놓았다. '제63회 현충일'인 오늘 인천학도병의 사연이 KBS1 라디오 전파를 탄다. 이 원장은 '정관용의 지금 이 사람'에 출연, 오후 2시30분부터 28분간 인천학도병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눌 예정이다. 이번 방송은 이제 다시는 이땅에 참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