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미투' 열풍이 한풀 꺾였다. 한반도 평화바람과 지방선거 영향도 있을 거다. 미투가 잠시 동안의 열풍보다 늘 부는 미풍(微風)이길 바라는 쪽이니, 숨고르기 국면도 괜찮겠다 싶다.
몇 달 전 썼다가 접은 글이 있다. 당시 미투 열풍에 토를 다는 건 어려웠기 때문이다. '괴물' 고은 얘기다. 시인 최영미 말마따나 고은은 괴물이다. 필자도 그리 봤다. 다만, '괴물'이란 기표(記表)는 같되 기의(記意)는 다르다.

고은을 괴물이라 떠올린 건 역작 <만인보>를 마주하고서다. 방대한 분량. 4000여편 시에 등장인물만도 5600명. 대작을 낳은 그는 영락없는 괴물로 보였다. 수십 권에 이르는 그의 시집과 소설도 마찬가지다. '수도꼭지 틀 듯' 쏟아낸 작품은 거대한 '괴물의 세계'여서, 그저 만만한 몇 작품 더듬거릴 뿐이었다.
미투 바람은 마침내 '괴물'의 이면(裏面)을 까발렸다. 가난한 시인 최영미 시 한편의 위력이다. 최 시인은 시 <괴물>에서 직설화법으로 엮은 시어(詩語)로 '노털 En선생'에게 화살을 날렸다. '괴물'은 거대 문단권력을 향한 야유이자, 성적 추문과 추태에 대한 고발이다.

시인의 시인을 향한 폭로는 파장이 컸다. 괴물은 이로써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고은이 머물던 수원시와 고향 군산 등 곳곳에서 흔적지우기에 나섰다. 사업이 무산됐고, 곳곳의 추도시들도 철거됐다. 흔적이 많으니 지우기의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흔적지우기는 마침내 교과서에 이르렀다. 교과서에 실린 고은의 시 11개 삭제다. 국민 10명 중 7명이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도 뒷받침됐다. 이쯤 되면 과잉이다.
주장은 교과서는 신성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내용은 바르고 맑아야 하며, 모두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믿음이다. 온갖 것들이 뒤섞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위험하다. 차라리 친일시인 서정주 시가 실린 게 자연스럽다.
고은의 추악한 행위는 범죄 수준으로 무겁다. 그렇다고 한 시대를 풍미한 '괴물' 시인 흔적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기왕 교과서에 실렸다면 그저 남겨둬 다음 세대의 교훈 삼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