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몽골침략과 강화천도
▲ 고려왕조는 1232년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강화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기마병 위주의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강화도는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 등으로 몽골군이 들어오기에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사진은 염하의 모습.
▲ '고려고종사적비'는 1232년 고려 23대 임금 고종이 강화도에 온 사건과 장소를 기념해 세운 비석으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에 있다.
악명높은 기마병, 중원 제패
강화로 수도 옮겨 39년 항쟁
염하·갯벌·유빙… 지리 이점
3중성 쌓아 7번 침공 막아내


高麗高宗事跡碑(고려고종사적비).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진 검은비석이 봄하늘을 향해 힘있게 솟아 있다. 사적비에서 바다 방향 철책 뒤로 북한 땅이 눈에 들어온다. 안개에 싸인 것처럼 봄철 미세먼지는 개풍군을 흐린 회색빛으로 덧칠해 놓았다. 그럼에도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2018년 봄,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399 일대 사적비 주변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 승천포(昇天浦)는 지금으로부터 786년 전인 1232년 음력 7월6일 고려 23대 임금 고종이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뱃머리를 댄 곳이다. 세계 영토의 4분의 1을 휩쓴 몽골제국에 맞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결심한 고려왕조가 강화로 수도를 옮기는 '강화천도'의 첫 여정이었다. 고려는 이후 1270년까지 강화에 수도를 구축하며 몽골제국과 전쟁을 치른다. 이 39년의 대몽항쟁 기간을 '강도(江都)시기'라고 한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기 한 해 전인 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들어온다. 제1차 침공이었다. 몽골침략 뒤 전전긍긍하던 무신집권자 최우는 대신들을 몇 차례 소집해 천도를 논의한다. 1232년 6월16일, 천도를 반대한 별초지유 김세충의 목을 자른 최우는 마침내 임금을 앞세워 강화천도를 단행한다. 고려는 고려일 뿐, 몽골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고려는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몽골이 어떤 나라인가.

12세기 중반 몽골유목민 출신인 칭기즈칸(생몰년 1155 추정~1227). 어려서 아버지를 독살로 잃고 불우하게 자란 그였으나, 결국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며 거대한 기마병군단을 양성해낸다. 이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복하며 대영제국에 이어 역사상 2번째로 큰 제국을 건설한다.

몽골족은 말이나 양을 키우며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건물이나 조형물은 필요하지 않으며 목초지 확보나 재물의 약탈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토지와 노예를 얻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농경사회 국가와는 목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유목민인 몽골군은 궁술과 기마로 단련된 특수부대였다. 3~7살이면 이미 말을 능숙하게 다뤘고, 체형 자체가 말 타기 좋은 안짱다리가 많았다. 몽골군은 보급부대 없이 군인 1명당 5~10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하루 70㎞씩 이동이 가능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하루 20㎞를 이동한 것에 비하면 3배가 넘는 수치이다.

몽골군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심리전에 능숙했다. 항복할 경우 점령지 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것에 그쳤으나, 저항할 경우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살육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런 소문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백기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몽골군이 유럽의 기사와 싸우는 방식 역시 말을 이용한 전투였다. 유럽기사가 입는 전신갑옷은 그 무게만 30㎏~40㎏에 달했는데 장비가 워낙 무겁다보니 사람도 말도 쉽게 지쳤고 몽골군은 이같은 약점을 활용했다. 처음엔 후퇴하는 척 하다 유럽기사들이 지치면 다가가 활을 쏘거나 돌멩이를 던져 죽이는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한 것이다.

거대한 피바람을 일으키며 중원을 제패한 몽골제국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기마병 위주이다보니 백병전과 해전에 취약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살이 빠른 염하와 갯벌, 겨울철 유빙과 같은 강화도의 지리는 몽골군이 싸우기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오랑캐 종자가 비록 완악하다고 하지만 어찌 능히 날아서 물을 건널 수 있으랴. 저들도 역시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쳐 시위할 뿐이네 … 중략 … 물에 들어가면 곧 모두 죽을 것이기에".

이규보의 시는 고려의 강화천도 배경을 추정하게 해 준다. 강화도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이 한 곳으로 모여 황금어장을 이루는 황금바다이기도 했다. 본래의 수도인 개경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측면도 고려했을 것이다.

고려왕조가 천도한 뒤 강화도는 현에서 군(郡)으로 승격하며, 이름도 '강도(江都)'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다. 고려왕조가 강화천도를 단행한 뒤 몽골군은 전국을 유린하며 보복에 나선다.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9층목탑 등 무수한 문화재가 소실된 시기도 이 때다.

몽골군은 1257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며 끊임없이 항복과 개경환도를 요구하나 고려왕조는 외성·중성·내성의 3중성을 쌓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고려는 아울러 능란한 외교술로 대처하며 개경환도를 단행하는 1270년까지 강화도에서 국가를 지켜낸다. 이 기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과 같은 눈부신 문화유산을 남긴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786년 전, 승천포에 서서 고종이 바라보았을 개경의 종묘사직은, 2018년 기자가 바라보는 북한 땅처럼 처연했으리라.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강화평화전망대 한바퀴]

전쟁 역사체험 '과거로'통일 테마여행 '미래로'


강화평화전망대는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에 지난 2008년 개관했다. 전망대 앞 약 2.3㎞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오른편으론 개성공단이 위치한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가 각각 위치한다.

왼쪽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연백군이 자리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개관 전까진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던 곳이나 지하1층·지상4층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안보관광지로 탈바꿈했다.

1층에선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을 살 수 있는 토산품 판매장을 만난다. 스넥과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과 게스트룸도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 개풍지역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국방체험과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에 관한 설명도 만난다.

끝나지 않는 전쟁,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을 테마로 한 전시물도 관람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과 전쟁 뒤 피해참상 등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3층 역시 전망시설이다. 북한의 산하가 한 눈에 들어오며 해설사의 해설도 들을 수 있다. 강화군 관계자는 "호국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국방 역사·문화 유적으로 다른 지역 안보관광지와는 차별화돼 있다"며 "다시 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람시간은 오전9시~오후6시. 오전 10시~오후4시. 032-930-7062,3

/왕수봉 기자 8989king@incheonilbo.com

인천일보·강화군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