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같은 절망의 현실 '오타쿠'는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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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윤 작가는 오늘도 누구보다 밝고 재밌게 엄마 옆에서 분신같은 인형을 만들고 있다. 지난 1일 인천여관x루비살롱 카페서 만난 유재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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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희귀병
얼마후 아빠마저 암 판정받아
24시 간호로 '나'를 잃어갈쯤
'내 새끼'를 만들기 시작했죠


"하고픈 것도 아직 배울 것도 많은데 유재윤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죠. 다들 정신 차리고 돈이나 벌라는데, 도저히 내 새끼같은 인형들을 못 놓겠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스케치북에 끼적대길 좋아했고, 만화를 사랑한 한 젊은이는 늘 호기심이 많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술과 만화, 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 기웃대며 작가로의 영양분을 쌓아가던 어느 날, 엄마는 쓰러졌고 아빠는 주저앉았다. 20대 끝자락에 거짓말 같은 날들이 이어졌지만 유재윤(30) 작가는 주어진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요즈음 인천에서 가장 핫(Hot)한 작가로 떠오르고 있다.

논밭에서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인천 남구 학익동이 여물어가는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유 작가는 글자가 빼곡한 책보단 하얗게 텅 빈 연습장이 더 좋았다. 미술학원을 함께 운영하던 유치원을 다니면서 하늘과 우주를 그리며 미술을 향한 꿈을 채워갔다. 수업 시간은 물론 집에서도 엄마와 종이를 펴고 벌러덩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며 노는 게 가장 큰 재미였다. 교복을 입은 그는 만화부에 들어갔고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가 된다.

"창피할 정도로 일본 만화 '덕후'(일본의 광적인 애니메이션 마니아)가 됐어요. 일본 캐릭터를 따라 그려보다가 제가 표정과 성격을 직접 불어넣어 캐릭터를 만들어보면서 꿈을 그렸죠."

"아빠 나 실업계 갈래.", "재윤아 그러지 말고 예고는 어때?" 평소 딸을 지켜보며 성향을 파악한 아버지의 권유로 벼락치기로 성적을 올리고 화실에 다니며 준비해 인천예고를 거쳐 인하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다.
붓도 잡고 카메라도 잡고 만화도 그리던 그는 지인 소개로 패션을 다루는 작은 회사에 들어간다.

인생 첫 직장이기에 더욱더 '파이팅' 넘치게 문을 열었다. 그에겐 '기자'라는 호칭이 붙어있었다. 그는 "대표가 '너 이제 기자야'라며 글 쓰는 사람을 붙여주고는 여기저기 가서 사진 찍어오라고 하더라"라며 "미술전공자도 없고 뭐하는 곳인지 고민하던 사이 1년이 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안 되는 직원을 전부 불러 모은 대표의 "오늘부로 끝내겠다. 짐 싸서 다 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그는 백수가 됐다. "제 잘못도 아닌데 이유도 모른 채 백수가 된 것도 어이없고 제 자신이 등신 같았어요. 자존감도 통장 잔고도 바닥을 쳤어요."

정신 줄을 고쳐 잡은 그는 '문화 불모지'라 불리는 인천보다 서울이 더 재밌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거란 판단에, 홍대 근처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일을 시작한다. 비록 아르바이트였지만 피규어 수업도 재밌고, 앨범 재킷 디자인도 흥미롭고 실크스크린도 관심이 커졌다. 인천에선 경험하지 못한 문화의 깊고 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젊음을 무기로, 열정을 방패삼아 모조리 보고 배웠다.

"집안 모든 공기가, 저도 오빠도 아빠도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는데, 엄마는 아니었나봐요."

2015년 5월, 이불 속에서 잠이 덜 깬 유 작가는 방문 너머 아침을 준비하며 일 나가는 오빠를 배웅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 8시가 지났을까, '우웩!' 귀를 파고든 소리에 놀라 나가보니 엄마가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계셨다. '장염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실에 나와 TV를 보는데 안방으로 간 엄마가 또 구역질을 하는 게 아닌가. '어휴~ 엄살은.' 맥없이 침대로 쓰러진 엄마는 계속해서 토하며 의식을 잃어갔고, 놀란 유 작가는 어렵사리 119를 눌렀다.

"뇌출혈에 뇌경색, 뇌졸중에 모야모야병까지 앓고 계셨네요?"
평소 혈압 약만 꾸준히 드셨던 엄마가, 병치레는 커녕 장난치고 그림 그리며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가 한순간에 눈을 떼면 안 될 '갓난아기'가 됐다.

인하대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에 오기까지, 가족 중 수입이 가장 적은 유 작가가 엄마의 그림자가 됐다. 코에 튜브를 끼워 영양분을 넣어드리고, 대·소변 할 것 없이 용변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젊은 처자가 낑낑거리며 엄마를 먹이고 씻기고 주무르고 책도 읽어주고 아기 돌보 듯 하니 병실 사람들이 대견하게 보기도 했다.

"사실 이제 뭐 좀 해보려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몸과 마음이 지쳐 화도 났어요. 하지만 나중에 후회할까봐, 또 키워준 것을 효도하며 갚을 기회라 생각하고 미친 듯이 간호했어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이 아닌, 재활 치료하는 단 25분뿐. 학자금 대출 독촉 전화에 늘어가는 병원비, 모든 상황이 그를 짓눌렀다. 가장 큰 건 와중에도 놓고 싶지 않은 작가의 꿈. 틈틈이 담당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캐릭터를 그려주며 갈증을 해소했다.

엄마의 상태가 나아져 이제는 대화도 조금씩 통하는 세 살배기 정도가 돼서야 그의 시간도 늘어났다. 그는 "예전부터 멍청하고 괴상해보이면서도 성격을 넣어주고 스토리를 심어 '누군가'같은 인형을 만들고 싶었다"라며 "엄마 옆에 쭈그려 앉아서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내 새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펠트를 이용해 독특한 디자인과 콘셉트로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 하나하나에 개성을 붙여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옷을 입히며 웃음을 되찾고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아트토이 작가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첫 전시 '만석동 : 전설의 시작'이 지난해 12월 열렸다. 유 작가는 "만석동에 사는 가상의 인물을 인형으로 표현하면서도 다른 작가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걱정했는데 관람객들까지 너무 좋아해주셔서 용기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20대 끝자락, '이렇게 엄마 옆에서 내 인생은 끝나겠구나' 싶을 때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였기에 더욱더 벅찼던 그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암 판정을 받고 집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하셨지만, 시궁창에 떨어진 그에게는 계속해서 늘어가는 분신 같은 인형들이 있었다.

지난달 13~28일 신포동 근처 카페 인천여관x루비살롱서 열린 소비권장 '춒먕횺 백화점' 전시를 통해 명실상부 인천의 독보적인 아트토이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인형뿐만 아니라 포장까지 일일이 다르게 해 모든 게 한 작품"이라며 "작은 친구들을 만나며 스트레스도 풀고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간절함이 남달랐어요. 단순히 이 분야에서 성공해야지가 아닌 '유재윤'을 찾자는."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내 것'을 찾았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주변에서 모두 현실적으로 돈이나 벌라며 만류했지만 작가라는, 예술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싶지 않았던 그의 '객기'가 지금의 유재윤 작가를 있게 했나보다.

/글·사진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