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무릇 사물이나 현상은 한 발짝 떨어져 볼 때 제대로 보이나 보다. 언론에 몸 담았을 때 뵈지 않던 것이 물러나 있으니 종종 보인다. '객원(客員)'이란 신분의 장점일 수 있겠다. 정규 구성원 아닌 빈객(賓客)의 자유로움에, 마치 남의 일 구경하듯 볼 수 있으니 그렇다. 덩달아 이른 아침 배달되는 신문을 볼 때마다 혀를 차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무책임한 객의 객쩍은 버릇이다.

1주일쯤 전인가. 본보에 시민편집위원회가 출범했단 기사가 실렸다. 큼지막한 사진에 여럿이 담겼다. 위원회에는 여러 분야 전문가 15명이 참여했다. 이들과 함께 시민저널리즘, 공공저널리즘을 구현하겠다는 포부다. 알림 기사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부탁으로 닫았다.

짧은 '사고(社告)'는 여러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위원 위촉 기준은 뭔지, 어떻게 모이는지, 어떤 논의를 하는지, 의견은 구속력을 갖는지, 심지어 독자 성원은 어찌 보내야 하는지 등등. 물론 하릴없는 빈객의 잡념 수준일 수 있다. 이미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바,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걸 전제했을 테니 말이다. 하나 해당 지면을 접한 수용자, 즉 독자 일반이 그렇진 않을 거다. 한때 몸 담았던 필자조차 그런 것처럼 말이다.

궁금증은 꼼꼼히 읽은 그 날 신문 기사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예를 들면, 안양시가 마을서점 13곳을 지원한단 뉴스에서는 정작 중요한 13곳 마을서점 정보가 빠졌다. 그러니 안양시 홍보기사일 뿐 수용자를 위한 기사는 아니다. 이런 기사는 지면 전반에 널려 있다. 공공부문의 정책 공급자가 주요 뉴스공급자니 그럴 수 있겠다.

공공부문이 정책수용자 쪽을 향한 거의 모든 메시지는 일방적 공급자 중심이다. 따라서 정책수립(input)→집행실적(output)으로만 평가할 뿐이다. 정작 중요한 수용자 중심의 평가(outcome), 즉 도시나 시민사회의 영향과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거다. 언론 역시 공공부문과 가까워지면서 서로 닮아가는 거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몫은 사실상 감당할 곳이 없어지는 셈이다. 새삼 '목탁론' 등 흘러간 얘길 들먹이고 싶진 않다. 그저 언론이 수용자의 신뢰를 얻으려면 좀 더 그 쪽으로 다가가는 게 맞을 거라는 상식적 변화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