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연꽃' 띄워도 50년째 계속된 통증
▲ 2000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3만 달러를 기부해 세운 하미마을 위령비.
▲ 하미마을 학살 당시 한쪽 발을 잃은 생존자 쯔엉 티 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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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은 끝까지 한국군을 믿었다

1968년 135명 학살된 하미마을
"도망은 커녕 순순히 모여" 증언


같지만 다른 '낮과 밤의 참배'

낮에는 헌화하며 용서 구하고
밤에는 이름 부르며 정서 교감




평화순례기간 내내 증오비, 위령탑, 전쟁증적박물관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 쉼표를 찍듯이 숨을 쉴 수 있는 여백의 시간도 있었다. 중세풍이 느껴지는 노란색의 네온싸인 아래로 투본강은 유유히 흐르고 우리 일행은 호이안(Hoi An) 거리를 느긋하게 거닐었다.

투본강변을 따라 여행객들의 소원을 담은 푸자 향초가 강물에 형형색색 떠다니는 아름다운 구시가지는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래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고 한국인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온다.

일행 몇몇과 한적하게 기웃거리며 프랑스풍 레스토랑에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됐다. 숙소까지는 도보로 약 15분 거리. 네온은 사라지고 듬성한 불빛 그림자가 더욱 도드라진 호이안의 밤 풍경. 이곳을 느릿느릿 걸으니 문득 욕망이 차올랐다. 낮에 보았던 하미 위령비를 지금, 밤 12시에 찾아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밤에 빛을 모아 비석에 영상을 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쟁과 대량학살에 의한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산자의 넋두리와 죽은자의 넋풀이' 프로젝트다. 빔 프로젝트를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건물 외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기법)로 희생자의 유품과 사진 그리고 유가족 인터뷰를 사전 녹화해 편집한 후 비석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이안 거리에서 캄캄한 밤이 되자 순간 '우우~' 울어대는 듯한 바람속의 하미 위령비가 떠올랐다. '한 밤중의 풍경과 느낌은 어떨까? 찾는 사람을 있을까? 낮에도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데 밤 기운은 어떨까?' 등 강렬한 욕망에 온 몸의 잔털이 솟구쳤다.

이것은 단순히 직업적 발로가 아닌, 대낮에 찾아 봤을 때도 세찬 모래 바람과 평평한 구릉지에 덜렁 혼자만 남겨진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곳, 한국군에 의해 135명이 학살당한 채 묻혀 있는 곳, 바로 위령비 옆에 안치된 묘역을 아무도 찾지 않을 한 밤에 가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 때문이었다.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68년 2월22일(음력 정월 24일) 청룡 부대의 3개 소대가 하미 마을을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들어와 마을 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동소총과 유탄발사기가 발사되었고 마을 30가구 135명 주민이 2시간 만에 학살당했다. 학살이 끝난 뒤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서둘러 무덤을 만들고 희생자들을 묻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져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들을 한꺼번에 매장했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불러 모을 때 크게 저항하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이에 대해 생존자인 응웬 티 본은 '사람들이 혹시나 죽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군인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려고 모으는 것이라 여겼다'고 증언했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학살 이전에 주민들이 부대원들을 기억할 정도로 한국군과 관계가 좋았다.

또다른 생존자인 팜티호아 역시 같은 증언을 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요.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예요."

거대한 위령비 뒤쪽에는 연꽃 문양으로 대리석을 덧씌워 놓았는데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 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해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위령비 건립 과정에서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학살의 경과를 적은 비문을 지워줄 것을 요청했고, 마을 주민들은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비문을 지울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위령비는 뒷면 비문을 연꽃 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로 제막됐다.


위령비 비문 내용

1968년 음력 1월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를 기리다.(중략)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중략)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하미학살은 올해 50주년을 맞이해 유가족들이 모여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와 한국군에 희생당한 135명의 민간인을 추모하는 50주기 위령제를 함께한다고 한다. 부디 향을 사르고 헌화하여 그날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 낮에는 참배하고 분향하고 헌화하며 그들의 아픔을 기리고 용서를 바란다면, 밤에 하는 나의 작업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 해원(解寃)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산자의 넋두리와 죽은자의 넋풀이를 하는 미디어 툼스톤'이다.

혹자는 '왜 그렇게 밤에 혼자서 무얼 비냐'고 묻는다. 한 밤중의 참배는 시야가 좁아지고 상상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온몸과 마음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준비해간 술과 담배를 드리고 '하얀 빛을 보고 가시라' 하고 빌어주는 것 외엔 없었다. 이는 제주 4·3 해원상생굿의 '열명부르기'와 같은 것으로 4·3사건 당시의 희생자 이름 한명씩을 심방(제주에서는 무당을 '심방'이라 일컫는다)이 전부 불러주는 것처럼 고인들을 잊지 않고자 하는 행위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미 위령비에서 만난 할머니, 머리에 갈색 보자기를 쓰고 남색 천의 헐렁한 면바지, 쥐색 스웨터를 입고 걸음걸이가 불편한 80대 할머니 한 분이 위령비 쪽으로 허정허정 걸어오신다. 쯔엉 티 투(1938년생·80세) 할머니는 1968년 1월24일(음력), 꽝남성 디엔반 현 디엔즈엉 사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로학살 당시 수류탄 파편에 오른발을 잃었고 왼쪽 다리, 엉덩이, 허벅지 등에도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에 의해 가족 친척 모두 12명(새언니 2명, 올케 1명, 자녀 2명, 조카 7명)을 잃었는데 당시 딸은 7살, 아들은 4살이었다. 한국군이 집에 불을 지르자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3개월 된 셋째 딸과 집밖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한다. 이때 딸도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한쪽 발이 없어 거동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당시 부상을 입었던 신체 부위마다 지금까지도 심한 통증이 있다고 한다. 셋째 딸도 화상으로 인해 걷기가 불편한 상태다. 쯔엉 티 투 할머니에겐 전쟁의 상흔(傷痕), 그 한(恨) 많은 세월이 깊은 주름에 굵게 패여 있는 듯해 너무나 안타까웠다.

퐁니 마을에서 만난 탄 아주머니(59세)는 8살에 총상에 입어 내장이 쏟아져 나온 후 엄마를 찾아 혼절 했다. 그 이후 그녀는 '한국군이 왜 우리 가족을 죽였을까? 어린 나를 왜 죽이려 했을까?'를 매일 생각했었단다. 탄 아주머니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이제 편안해 지세요. 정말 죄송해요.' 라고 위로해드린 것처럼 하미 학살 생존자 쯔엉 할머니에게는 "울지 마세요. 사랑하는 가족들은 죽으면 다시 꼭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힘내세요" 라고 말했다.

쯔엉 할머니의 손을 잡은 후에 힘겹게 버티며 살아온 '반쪽 발'을 쓰다듬고 위로하려는데 뭉클한 촉감이 눈을 통해 본 것 보다 더욱 실감나게 전해져 온다. '아 … 한 평생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다시금 비애감(悲哀感)이 몰려온다.

총은 쥐어지면 쏘고 싶고 , 칼은 쥐어지면 베고 싶다. 그리고 돈은 쥐어지면 쓰고 싶은게 물성이 주는 특별한 기운이 있다.

집단희생자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불러주는 '열명부르기'도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기운이 있다. 그들을 잊지 않고 함께 한다는 것은 인류의 화합과 더불어 보편적 규범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살의 잔혹한 이미지 보다 정서적 교감이 더 중요함'은 피해자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유한성 너머에 타자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 유한한 존재를 넘어 타자를 인정하고 교감하며 나누는 것이야말로 '선의 세계'이고 득도이며, 해탈이자 천국이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책감을 평생지고 살아가야 한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모든 깨달음이나 수행은 실천으로 완성 된다'라고 한 말과 같다.

그렇게 제주4·3 희생자, 광주5·18 희생자, 티베트 분신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렀고 이젠 베트남

전쟁 희생자 이름를 부르려 한다.

한 밤에 참배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이름 불러주며 교감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 그렇게 나는 호이안 밤거리에서 하미 학살 위령비를 계속 떠올렸고, 끝내 호텔의 눅눅한 침대에서 비몽사몽 잠을 설치다 천근만근이 되어 다음 날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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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게 하는 약을 다오".

쯔엉 티 투 할머니의 이 말이 자꾸 귓전에 맴도는 것은 왜일까? 


사유진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