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사랑한 '파란 눈 의사' … 의료·선교·교육에 헌신
▲ 189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 오른쪽이 랜디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랜디스 묘 출토 십자가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일라이 바 랜디스' 묘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랜디스 묘 비석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랜디스 기념비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성누가병원/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5.jpg
▲ 내동 성공회성당에 세워진 랜디스 박사 흉상.
``````````````````````````````````````6.jpg
▲ 내동 성공회성당
1890년 고요한 주교와 인천 선교사 부임    

주민들에 인술 … 영어학교 열어 고아 교육    

33세 젊은 날 과로·장티푸스로 세상 떠나



#논어 읽는 파란눈의 의사

130년 전 개항장 인천, 자유공원 동쪽 언덕에서 저녁마다 '논어'와 '맹자'를 '진짜 한국식으로(in true Korean fashion)' 읽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인 젊은 내과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가 진료를 마치고 한국어와 한문공부를 하는 소리였다. 그는 1890년 9월 약관의 나이에 영국 국교, 성공회의 의료 선교사로 인천에 왔다. 그는 제물포 최초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운영, 개항장 주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병원 안에 야간 영어학교를 열었으며, 고아들도 돌봤는데, 이는 인천 고아원의 시초였다.

이렇게 그는 의료와 교육 등을 통해 제물포 지역의 계몽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당시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어 병고에 시달리던 환자들에게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는 인도주의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는 '남득시(南得時)'라는 한국이름을 쓰면서 한국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약대인(藥大人), 낙선시병원(樂善施醫院), 'little doctor'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는 서양인 중에서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국 풍속과 민속에도 이해가 깊어 한국에 대한 논문도 많이 발표했다. 한문에도 밝아서 한국 전통의학의 성전으로 여겨지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의사, 선교사, 한국학 학자로 8년 동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30대 젊은 날 인천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지금은 인천가족공원 27번 묘지에 영면해 있다.

인하대학교 이영호 교수는 "일본인 및 중국인을 위한 야간영어학교를 운영하면서 수강생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면서 "개항장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야간영어학교(Night English School)를 열어 이를 통해 선교의 기회를 얻으려는 한편, 고아들을 기르며 교육했다. 그는 사제가 아니지만 의료활동, 교육활동, 고아양육을 통해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했다"고 했다.

#선행으로 기쁨을 주는 병원

"한국에서 8년 동안 '의사(Medical man)', '선교사(Missionary)', 그리고 '학자(Scholar)'로서 훌륭하고 철저하고 끈기 있게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랜디스 추모사 중에서)

랜디스는 186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에서 태어났다. 1888년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향인 랭커스터 공립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 의사였다.

영국 국교, 성공회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1890년 9월 29일 조선의 항구도시 제물포, 인천에 왔다. 그는 성공회의 한국선교 책임자로 선임된 영국 해군 종군 사제 출신인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主敎)와 함께 인천에 선교사로 부임했다. 성공회가 한국에서 선교를 처음 시작한 시점이다.

그는 제물포에 도착하자마자 그해 10월10일 임시로 입주한 성당의 한 방을 시약소(施藥所)로 만들어 의료 활동을 시작, 12월까지 2개월 동안 외래환자 35명, 왕진환자 25명을 진료했다.

이듬해 10월 지금의 내동 성공회 성당 자리에 성누가병원을 건립했는데, 그는 병원 이름이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과 관계가 없다면서 별도로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고 써 붙였다.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이라는 의미로 그가 직접 작명한 한문이름이다. 제물포 주민들은 성누가병원을 약대인병원(藥大人病院), 병원이 있던 응봉산을 '약대인산'이라고 불렀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병원은 성공적인 의료 사업을 펼쳤다.

랜디스는 한국학 연구에서도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그는 언어, 민속, 종교, 역사, 과학 등과 관련해 24편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 중에서도 불교경전, 유교의례, 민간 신앙, 동학 교리 등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문도 공부해 동아시아 고전과 한국의 한문서적을 탐구할 수 있었고, 제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Mark N. Trollope, 1862~1930)의 추모사에 따르면 "환자들과 한국 및 중국 서적에 둘러싸여 토착민처럼 살았는데 무척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묻히다

랜디스는 1898년 4월16일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과로와 장티푸스 등 이었다. 1895년 성탄절, 그는 조선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서 휴식을 취하고, 귀국 후에는 8개월 동안 서울의 병원과 진료소를 맡아 운영하다가, 1897년 3월 제물포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송림동 한국인 마을에서 살았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쓴 논문과 소장 도서를 트롤로프 주교에게 부탁했는데, 제물포와 정동을 거쳐 현재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랜디스 문고(English Church Mission:Landis Library)'로 남아있다. 묘비명은 라틴어로 기록됐다. 'H. S. E'는 'hic sepultus est(여기에 묻히다)'의 약어이고, 랜디스가 1865년 미국 랭카스터에서 태어났으며 8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다가 1898년 4월16일에 사망한 의사라는 내용이다. 현재는 묘비가 많이 훼손돼 'LANDIS' 이하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인천의 이방인들
인천가족공원 내 외국인 묘지에는 1번부터 66번까지 각 묘지 순번을 매겨 뒀다.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인천에 묻혀있는 이방인들이다. 그들에게 뭇 사연이 있으련만 기록에 남겨진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1번 묘에 잠들어 있는 찰스 앨버트 허친슨(1907~1950)는 1948년 6월14일 주한 미국 대사관 일등서기관 겸 서울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돼 내한, 임기 중 사망했다. 프랜시스 셔만(1863~1883, 3번 묘)은 미국 시카코 출신으로 1882년 해군에 입대해 군함 엔터프라이즈 호에 승선, 이듬해 겨울 내한했다가 사망했다. 미국 뉴욕 출신 조지 버크 모트(1836~1883, 5번 묘)은 1883년 6월 미국 상회인 레이크 상사의 후원을 받아 내한했다.

제물포에서 무역업에 종사할 예정이었으나 도착하자마자 앓기 시작, 입국 2주만에 숨졌다. 묘지명의 '젠추안(Jenchuan)'은 '인천'을 중국어로 발음한 것으로, 일본어 발음인 '진센(Jinsen)'과 함께 당시 외국인들에게 사용됐다. 찰스 헨리 쿠퍼(1835~1889, 8번 묘)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1883년 12월 내한했다.

당시 조선에는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와 극소수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이듬해 제물포의 허름한 건물에서 통조림과 서양 주류 등을 판매하고 단독건물도 지었다. 알렌의 저서 '연표'에 따르면 그가 지은 건물은 향후 제물포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쓰일 예정이었으나, 제물포에 영사관이 개설되지 않은 관계로 미국 정부에 양도됐다.

한 개의 묘비(9~10번)에 두 사람 이름이 있는 묘비도 있는데, 이들은 미국 군함 볼티모어 호 선원으로 1894년 내한 했다가 사망했다. 묘비는 볼티모어 호의 동료들이 세워 줬다.

/글·사진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내동 성공회성당

랜디스 '성누가병원' 개원 … 1956년 성당으로 세워져

영국의 국교, 성공회는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 신부였던 코프 주교와 내과의사인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하면서부터 인천선교를 시작했다.

코프 주교가 현 인성여자고등학교 체육관 뒤 송학동 3가 3번지에 있던 교회를 중심으로 포교에 전념할 때, 랜디스는 현재의 내동 성공회성당(사진) 자리에서 성누가병원을 개원하고 의료구호사업에 전심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1902년에는 한 때 6개월 동안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됐고, 1904년 제물포 해전 당시 일본 적십자병원이 설치되기도 했다. 1934년 인천전도 구로 승격했으며, 6·25전쟁 때 일부 파괴됐던 것을 수리해 1955년까지 중학교 교사로 이용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 성누가병원이 있던 곳에 세운 것으로 1956년 6월에 완공한 것이다. 건물의 형태는 지붕의 목조 트러스트를 제외한 외벽을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중세풍의 석조건축이다.

(인천유형문화재 제51호, 인천시 중구 내동3)


관련기사
130년 전 '선교사 랜디스' 환자 국적불문하고 돌봤다 130년 전 개항기, 성공회 의료 선교사로 인천에 왔던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박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일본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의료활동을 펼치며, 전국적인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16면 인하대학교 사학과 이영호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랜디스의 의료활동과 한국학 연구'에 따르면, 랜디스가 진료를 맡아보던 제물포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에는 개원 초기(1891년 10월~1892년 9월 환자 통계)에 한국인 3079명, 중국인 385명, 일본인 130명 등 연간 3594명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