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환 논설실장
오랜만에 옛 단골집을 찾았더니 여주인이 "술은 빨간 거, 파란 거"라고 묻는다. "알면서"라고 하니 "요즘 빨간 거 찾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했다. 병 뚜껑이 붉은 색인 20.1도 짜리 소주 얘기다. 16~17도 짜리 순한 소주가 대세인 가운데 거꾸로 진한 소주를 찾는 주당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소주 도수가 너무 내려와 술 맛이 안난다는 것이다. '각 1병씩'을 다짐하고 시작할 때는 처음부터 빨간 거로 간다고 한다. 과거 소주는 무조건 25도짜리였다. 1997년 23도짜리가 나온 이후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줄곧 내려왔다. 요즘 빨간 뚜껑 소주는 100병 중 17병 꼴로 팔린다고 한다. 앞으로 소주의 알코올 도수도 여자들 치마길이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려나. ▶주류업계에서도 최적의 소주 도수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1995년이던가, 목포의 보해소주가 소주 도수 낮추기에 맨 먼저 뛰어들었다. 지역 소주를 묶어 놓았던 자도주(自道酒)법이 폐지되자 신제품으로 서울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25도에서 불과 2도 낮춘 소주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너무 앞서갔다는 것이었다. 소주 도수 바꾸기도 '반발짝'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국인들의 소주 사랑은 변함이 없다. 위스키와 보드카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이 팔리는 술이다. 브랜드별 세계 판매 순위로는 1위(하이트진로)와 3위(롯데소주)가 한국 소주다. 소주만큼 값이 싸면서도 품질을 갖춘 대중주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소주는 과거 배고픈 시대가 빚어낸 술이다. 1964년 갓 출범한 제3공화국 정부는 양곡관리법의 시행에 들어간다. 보릿고개를 못 넘겨 굶어죽는 마당에 곡식으로 술을 빚어서는 안된다는 법이었다. 대신 동남아 지역의 구황식물인 값싼 타피오카 등을 수입, 주정(酒精)을 만들어 소주업체에 배급했다. 희석식 소주의 시작이다. 원재료가 싸다보니 소주는 저임금의 공단 근로자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값싼 술이었다. 양곡관리법은 1977년 식량완전자급으로 쌀막걸리가 나오면서 해제된다. ▶언제부턴가 '아직도 양주 마시면 촌놈'이라는 얘기가 회자된다. 이 술 저 술 다 마셔봐도 소주가 최고라는 얘기다. 양주만 파는 술집을 갈 때면 외투 주머니에 몰래 소주를 끼고 가는 주당들까지 있다. 양주는 접대술이고 소주는 기분술이라고도 한다. 술에서도 사대주의를 벗어던진 자존감이 사뭇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