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겸 연출가 윤사비나
▲ 윤사비나 연출가에게 전신탈모증이나 희귀병은 더이상 콤플렉스가 아닌 그의 자랑스런 타이틀 중 하나다.


23살에 전신탈모증·면역결핍
낙담하고 무대서 내려왔지만
오히려 못해봤던 배역 들어와
퍼포먼스·연출까지 영역 확장


인생에서 서른 또는 30대는 황금기이면서도 힘든 시기다. 입시와 취업의 길고 긴 터널을 넘어 봄이오나 했더니 또 결혼과 승진 등 계속되는 겨울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30대.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기에 30대는 아직 무한한 가능성으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꿈 많고 에너지로 가득한 인천의 30대들은 날개 돋친 듯 지역을 누비며 종횡무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인천'이라는 판을 거칠게 때론 발칙하게 흔들고 있는 청춘들이 그리는 인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20대는 의지, 30대는 기지, 40대엔 판단이 지배한다고 했던가. 인천의 앞날을 이끌어 갈 보배 같은 30대들의 힘찬 '희망가'를 들어본다.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나보다 훨씬 더 심한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고 직업이 환자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병에 걸렸을까만 계속 생각할 수는 없잖아."
-윤사비나 '그녀의 대머리에 관한 고찰' 중-

'대머리 여배우', '전신탈모증'. 배우의 수식어 치곤 꽤나 놀랍다. 남들 앞에 서기 좋아하고 넘치는 끼로 기지개를 펴던 찰나, 순식간에 그의 인생은 바뀌었고 어쩌면 곤두박질쳤다.

"머리털이 없어서 '사비나'가 법명인 줄 아는 분도 많아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당당한 그는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연극 같은 인생사로 초대했다.

"예체능은 저 혼자였으니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어요. 졸업할 때는 새로운 분야를 열었다며 공로상을 주더라고요."

넘치는 끼와 재능으로 늘 몸이 근질거리던 딸을 일찌감치 알아본 부모는 평범한 길을 걷게 하려 비평준화 시절 공부 꽤나 한다는 서인천고등학교로 그를 덜컥 진학시켰다. 연극도 혼자, 배우로의 꿈도 홀로 키울 수밖에 없던 그에겐 스트레스가 가장 심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무용과 연극부 활동으로 몸짓이 익숙하던 그는 연기가 너무나도 하고파 무용을 전공하겠다 선언하고는 영화예술학부 연기과로 몰래 방향을 틀어버렸다. 날개 돋친 듯 무대에서 날아다니던 그는 대학교 2학년 황철민 감독의 독립 장편영화 '푸른하늘 은하수'의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극단 '민들레'의 아동극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연극계에 입문했다.

얼마 전 영화 '범죄도시'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진선규와 함께 연극계로 들어서며 꿈을 키우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과 훌륭한 작품으로 시작한 게 정말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꾸밈없고 솔직한 '아동'이라는 관객을 만나면서 관객과 소통하고 진실하게 연기하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학교와 대학로를 오가며 남부러울 것 없이 탄탄대로던 23살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자 지금의 윤사비나가 있게 한 날들이 시작된다.

"왜 갑자기 온몸에 털이 빠지게 됐는지 아직도 몰라요. 창문만 보면 뛰어내리고 싶었죠."

의사들도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원인이나 치료 방법을 내놓지 못했다. 머리는 물론 온몸의 털이 빠졌고 면역력도 약해졌다. 극심한 통증은 그를 괴롭게 만들었고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야만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자가면역결핍증' 그리고 '전신탈모증'. 남들 앞에 서는 직업의 그에겐 치명적이고 나락으로 끌고가는 악마 같았다. 머리칼이 한 움큼 빠질 때마다 삶의 의지도 한 움큼씩 빠져나갔다. 털이 빠지는 걸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기도 했지만 자신감이 무기던 그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결국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방에 틀어박혀 표현하지 못하는 열정을 종이에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희곡 '이상한 앨리스'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지원해 결국 무대로 진출하게 됐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내 외모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이상한 앨리스'로 지었다"며 "이때 용기를 얻어 2014년부터 다시 세상의 문턱을 넘게 됐다"고 말했다.

"'내가 왜 그렇게 예뻐야 하나' 싶어 대머리의 나로서 당당하기로 했어요."

가발을 벗자 오히려 '비구니'처럼 전에는 못하던 배역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기에 주력하던 그는 무용이나 미술 전시, 모델, 퍼포먼스, 연출 등으로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고,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경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예술단체 '문화다방 이상한 앨리스'를 창단했다.

그는 "당시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원망도 많이 했지만, 사실 현대인 중 안 아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며 "희귀병을 앓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되는 감사한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출가 윤씨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또 하나의 활력소는 삶의 반쪽을 채워준 남편과 5살배기 아들, 그리고 이번 달 곧 만날 뱃속의 '사랑이'다. "제 남편은 머리털 없다는 사실에 충격 받거나 질색하지 않고 오히려 예쁘다며 보듬어준 사람이에요.

자다가도 통증으로 몸부림치면 깨서 '우리 큰 아들'하며 주물러주고 돌봐줘요." 그의 확실한 조기교육 덕분에 아들 역시 "우리 엄마는 아픈 거야. 이상한 게 아니고 다른 거야"라며 남들보다 일찍 그리고 가까이서 '다름'을 배워 차별 없는 가치관으로 쑥쑥 크고 있다.

"내 병을 드러내서 저 같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계속해서 움직일 거에요."

올해부터 '원형탈모환우회'를 꾸리고 총무이사로 또 실제 질병을 겪고 있는 환자로 적극 나서고 있는 윤 연출가. 같은 고통을 겪는 자녀를 둔 엄마들은 그를 보고 '연출님처럼만 살아줬음 좋겠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는 "사실 나도 창피하고 가족들도 속상해하지만, 내가 어떤 훌륭한 성과를 이뤄서가 아니라 남들과 외모가 다를 뿐 보통 사람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하고픈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나 자신에게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도 던지고픈 한 마디가 있다면 무언가를 계속해서 시도해보라는 것"이라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가만히 있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실천하며 작은 성취를 밑거름 삼아 자신만의 꿈을 이뤄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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