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2월 2일 미국 상원은 위스콘신 주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의원 44명과 1명의 무소속 의원은 물론 매카시와 같은 공화당 소속 의원 절반(22명)이 그의 활동이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한 덕분이었다. 내각제와 달리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불신임'은 '탄핵'처럼 직위가 해제되거나 법적으로 처벌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명예 형벌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매카시의 정치생명은 끝장났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그의 폭탄발언으로 매카시즘의 광풍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는 등 공산주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는데 위협을 느낀 미국 국민들은 그의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매카시가 가장 먼저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언 래티모어를 비롯한 학계의 중국 전문 지식인들이었다. 이후 그는 대중국 정책을 수립했던 국무성 관리와 외교관, 심지어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해 애치슨, 마샬 등 유력한 정치인들까지 공격했다. 아무 증거도 없이 '빨갱이'로 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불신임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같은 당 출신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은 4선 연임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해리 트루먼에 이르기까지(1933~1953년) 민주당이 20년을 집권했다.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던 공화당은 뉴딜정책을 좌파정책으로 비난했기 때문에 전쟁영웅이자 공화당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모든 것을 공화당 매파의 희망대로 이끌어줄 지도자로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제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보수강경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신 '합리적 보수'로서 중심을 잡았고, 지난 정권의 사회복지, 경제 정책을 계승했으며 매카시의 불신임을 성사시켰다.

전후 미국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보수(保守)를 자처하는 이들은 많지만, 한국에 이런 보수가 있는가?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