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아현 인천시도서관발전진흥원 영종도서관 사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빔 벤더스 감독, 1993)에 등장하는 천사들은 높은 건물의 꼭대기나 동상의 어깨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다. 천사들이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타나는 곳은 도서관이다. 영화 속 도서관은 정숙한 분위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입을 꾹 닫은 채로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지만 천사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책을 읽는 목소리를 동시에 듣는다. 그야말로 왁자지껄하다. 화면은 느리고 조용하지만 정신없이 빠르게 들려오는 음성들의 향연이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도서관은 조용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에티켓이지만 그러한 인식은 학습을 위한 공간으로서 전통적인 도서관 열람실에서부터 출발했다. 요즈음 공공도서관은 다채로운 문화를 접하고 주민들이 만나 소통하는 만남의 공간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다.

10여 년 전 내가 대학도서관에서 근무할 때였다. 너덜거리는 반납 도서를 서가에 꽂다가 무심코 표지를 펼쳐보게 되었다. 한 사진작가의 에세이였는데 표지 뒷면에 대출자가 남긴 독후 메모와 메모 날짜를 시작으로 그 책을 읽었을 수많은 대출자의 감상이 가득 적혀 있었다. 단체 채팅방의 대화같았던 메모들은 더 이상 끄적일 여백이 없게 되자 끝이 났다.

도서관 책을 관리하는 사서로서 책이 훼손됐으니 화가 날법도 하고, 대학생이나 되는 사람들이 도서관 책에 낙서라니 흉을 볼 법도 하지만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의 초상이 그려진 대출카드를 발견했을 때의 훈훈함이랄까.

영종도서관은 영어원서 동아리부터 그림책까지 다양한 독서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나누고,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갑론을박의 토론이 펼쳐지기도 한다.

저명한 인문학 강사를 초청하여 인문학 강연을 개최하면 강연으로 끝날 때도 있지만 30분 넘게 토론과 질문이 이어질 때도 허다하다. 강사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던 시간이 어느 새 참여자들끼리의 토론으로 번져간다. 강연자도 참여자도 토론자로서 모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다.

시끌벅적 활동하기에 도서관이 좁게 느껴질 때에는 사람들이 함께 탐방을 나가기도 한다. 지역 주민들이 인문학 강연 후 버스를 타고 탐방에 나가 지역의 곳곳을 함께 둘러보고, 청소년들은 도서관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을 통해 영종지역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거나 연극 창작과 같은 문화예술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도서관에 대해 대부분의 어른은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이자료실은 다르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어린이들은 가만히 앉아 책을 보는 것이 더욱 어색하고 힘들게 보인다. 친구와 함께 학습만화를 보면서 낄낄 웃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공공도서관의 어린이자료실은 대체로 유아실과 아동실 같이 연령별로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친구와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어도 무리가 없도록 소란스러워도 괜찮은 공간이다. 그래서 조용한 도서 열람 공간과 구분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책을 읽고 싶어서 온 이용자는 책 저자와 만나기 위해서 도서관에 온 것이다. 혼자서 조용히 읽고 가는 책도 좋지만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은 후 느낀 점을 많은 이와 나눌 수 있다면 책과 문화를 향유하는 폭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친목을 다지는 것은 기대 이상의 덤이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심화한 독서뿐만 아니라 체험·기록을 통한 독서 역시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책을 읽는 것에만 목적을 가지지 않고 책을 매개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독서에 대한 흥미를 키울 수도 있다. 환경에 대한 책을 읽고 망원경으로 멸종위기의 저어새를 탐조해 보기도 하고, 염전에 맨발로 나가 느꼈던 따뜻하고 따끔거렸던 소금물의 느낌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책속 한 줄 이야기의 한 문장만으로도 모든 것을 신나게 시끌벅적할 수 있는 곳. 밤 늦은 시간까지 환히 불을 밝혀두고 이용자를 기다리고 있는 곳, 바로 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