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라 부르지 마라 … 이들은 '최고'였으니
▲ 1902년 제물포 전경 파노라마.  /사진제공=인천시화도진도서관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군함 광제호의 함장 신순성, 최초의 도선사 유항렬. 이들은 '인천해양'의 문을 연 선구자다. 인천에서 최초의 함장과 도선사가 탄생한 것이다. 인천 앞 바다로 향한 그들의 외침은 지금까지 인천해양의 힘이 되고 있다. 여기에 한국 해군 1번 잠수함 초대 함장 안병구 역시 인천사람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인천은 해양강국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혼돈의 바다, 근대 인천의 바다를 지키고, 척박한 항구, 인천항을 일구며, 한국 해군과 항만, 해운사업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무한한 자유의 상징인 바다를 동경한 그들이 인천의 바다를 중심으로 일군 치열한 삶의 궤적을 더듬어 본다.

▲ 유항렬 도선사

▲"바다 향한 애착엔 정년이 없다" 한국 최초 도선사 유항렬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것이 마지막 도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년 퇴직이라고는 하지만 바다로 향한 나의 애착과 집념엔 결코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죠."

우리나라 최초의 갑종 선장이자 도선사(導船士) 인 금농(錦農) 유항렬(劉恒烈 1900∼1971). 인천항에 발자취를 남긴 그는 도선사를 천직으로 여겼다.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사명감은 그가 마지막 도선을 마친 뒤 가진 한 언론 인터뷰(주간한국, 1970년 12월 6일)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인천항은 간만의 차가 심하고 내항으로 진입하는 수로가 좁아 어느 항구보다도 숙련된 도선사가 필요한 곳이다. 일본사람들이 항만 도선사를 장악하고 있던 일제 강점기 때, 도선사 면허를 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25년 일본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일본, 유럽 등 북미 항해사로 일하다 1930년 귀국, 이후 인천-칭타오(靑島)-상하이(上海) 간을 운항하는 평안환(平安丸, 3000t) 등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

그는 일본사람들의 견제와 반대를 극복하고 1937년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 면허를 취득한 것이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 모든 항만에는 일본 도선사만 취업하던 때다. 1971년 퇴임까지 34년 동안 3000척 가량의 각종 선박을 안전하게 도선했다.

특히, 해방 이후 미군정 전속 도선사 면허를 받고 척박한 환경에서 인천항을 홀로 지켰으며, 1947년 구호물자를 실은 미화물선 리퍼블릭호(2만5000t) 등 군함과 화물선 50여척을 심한 풍랑속에서도 무사히 입항시켰다. 또 6·25 전쟁, 1·4후퇴 당시 자신의 안위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인천항을 철수하는 미군함정과 모든 선박을 출항시킨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피난길을 나섰다.

그는 조선총독부, 미군정,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통치체계에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도선업이 항만시설이라는 공개념으로 우리나라 항만과 해운사업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도선사는 원양 항로를 다니는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기에 앞서서 그 선박에 승선해 선박을 안전한 수로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배의 선장은 골이 깊고 암초가 표시된 해도를 보고 항해하지만 항구에 가까워지면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다보니, 그 때 그 지역 바닷길, 수로를 잘아는 도선사가 승선해 선장 대신 배를 항구에 안전하게 접안한다.

인천 앞바다는 간조와 만조가 심하다. 큰배는 태안반도나 서산 앞에서부터 팔미도나 작약도 앞까지 끌어온다. 조금 작은 배는 팔미도 인근 바다에서부터 끌고 들어와서 인천항에 접안한다.

그는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다. 그 중 인천에서 낳고 자라난 7번째 아들 유재공(72)씨는 인천시립박물관조사보고서(인천항 사람들)에서 "도선사는 위험했지만 고수입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근면 성실했고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면서 "돈은 많이 벌었다. 그런데 어디,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것 사 주신다면서도, 다른 가족은 함박스테이크나 돈까스를 시켜도 아버지는 꼭 카레라이스나 먹고 뭐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아버지는 인천항에서 여러 나라 배들의 입출항을 도와주는 일을 했기에 빨간 벽돌 이층 집 내동 집에는 외국 손님도 가끔 왔다. 그 집에서 인천항이 훤히 내다보였다"며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끝나면 인천항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조그만 배에서 놀던 시절이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 안병구 함장

▲"생사를 건 잠항" 한국해군 제1잠수함 초대함장 안병구

'잠수함 침몰!'. "아니, 잠수함이 침몰하다니!"

지하철을 막 탄 그는 옆자리 사람이 읽고 있는 신문을 떨리는 손으로 낚아챘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스포츠 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었다. 프로야구 기사에 언더드로 투수가 경기에서 참패한 내용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신문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사과했다.

이 에피소드 주인공이 한국해군 제1번 잠수함,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을 지낸 안병구(安炳九, 1949~) 해군제독이다. 그는 1992년 독일에서 '장보고함'을 직접 인수해 왔다. 그에게 그런 기회는 어떻게 왔을까.

그는 1970년대 초 초급장교시절 미 해군에 잠수함 잡는 전술을 배우는 '대잠전' 유학을 갔다. 한국해군이 1950년 6·25전쟁 직전에야 군함다운 군함을 보유했기에, 잠수함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다. 그곳에서 '대잠전' 보다는 '잠수함' 자체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 유학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전입신고를 계기로 그의 인생은 크게 바뀐다.

"자넨 뭘 배우고 왔나?"라고 사령관이 물었다. "예! 잠수함을 배우고 왔습니다." 얼떨결에 나온 그 말이 그의 해군장교 생활 전부를 지배한 운명의 대답이었다. "안 중위는 이제부터 만사 제쳐 놓고 잠수함만 공부해라! 해군에 잠수함 전문가 한명 나오겠구먼"

이후 그는 해군본부 잠수함 사업단 요원 등을 거쳐 한국해군 제1번 잠수함 초대 함장으로 선발돼 승조원과 함께 독일에서 2년 동안 잠수함 교육훈련을 받고 1992년 현지에서 장보고함을 인수했다. 2005년 전역할 때까지 잠수함 부대의 전대장, 전단장 등 잠수함 부대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해군 숙원 사업인 잠수함 도입부터 시작해서 승조원 선발, 잠수함 운용 지침을 마련하는 등 그의 발자취가 곧 한국해군의 잠수함 역사인 셈이다.

잠수함의 잠항을 책임지는 함장은 잠수함의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잠수함 자체', 즉 잠수함과 함장은 완전히 '한 몸'이라고 한다. 잠망경을 통해 전술상황을 파악한 함장은 적함과 맞부딪치면, '죽느냐, 죽이느냐'는 생사의 결정을 해야 한다. 사자의 포효같은 외침으로 '어뢰발사!' 명령을 내리고 다음 표적으로 승냥이처럼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책, '잠수함, 그 하고 싶은 이야기들'(집문당, 2008년)에서 "잠수함이 바다 아래로 잠항하는 것은 생사를 건 환경바꿈이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이탈할 때나 재진입할 때는 표면에 수천도의 마찰열을 발생시키듯이, 잠수함이 잠항할 때는 무시무시한 수압의 저항을 받는다"면서 "잠항(潛航)은 피안(彼岸)의 항해"라고 했다.

잠수함 주제의 소설, '붉은 10월의 추적'의 작가 톰 클랜시가 "잠수함 함장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신과 같은 직무를 수행해야 하며 때때로 참으로 신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게 된다"고 했듯이, 그도 그같은 직무를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늘 '대한민국 해군 최초 잠수함 함장'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인천중학교(16회)와 제물포고등학교(13회)를 다녔으며, 해군사관학교(28기)를 졸업했다. 해군 주요 요직을 거친 후 2005년 전역했다. 그의 친형이 '대양해군 건설 준비'를 선포하면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인천고등학교 출신 안병태(安炳泰) 제독이다.

그가 한국해군 잠수함 역사의 산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해양도시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내면서 바다에 대한 집념과 동경을 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신순성 흉상
▲ 유항렬 흉상














# 인천사람이 왜 부산으로 가야만 했나

인천사람 신순성과 유항렬의 흉상이 2012년 5월 '바다의 날'에 부산 태종대공원 내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정부(당시 국토교통부)와 한국해기사협회가 해양발전과 항만발전에 세운 공로를 인정하고 이들의 흉상을 세웠다.

신순성은 구한말 개화파의 거두였던 박영효의 추천으로 일본 국비유학생으로 학업을 마친 뒤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양무호 초대 함장이었으며, 후배 양성과 해양발전에 공을 세웠다.

유항렬은 항해사와 선장으로 활동한 국내 첫 도선사였으며, 34년 동안 3000여척의 선박을 안전하게 인천항으로 입·출항시키는 등 국내 도선업과 항만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인천에는 그들의 숨결과 삶의 자취를 기억하고 공유하며 보존하고 있는 공간이 없다. 이들 인천사람을 부산에 빼앗긴 것은 아닐까.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사진제공=한국해기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