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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문화협회
▲ 고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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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마그달리나
고려인 디아스포라 80년.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지 8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구한말 한국에서 연해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최근에는 또 다시 러시아와 한국으로 이동하는 고려인의 삶은 고단하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사회를 이끌고 있는 각 분야 대표주자들을 만났다.
기획을 마치며 그들을 이야기를 통해 '끝나지 않은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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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라트 고려신문 편집장

"고려인 가족해체 기사 가장 기억나"

"젊은이들 한국·러시아로 … 잘 정착하길" 기원

올해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 박 빅토르(59)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사업가이자 우즈베키스탄 현직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행사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 세계 한민족이 모이는 국제포럼은 물론 각종 콘서트, 기념 전시회, 책 발간 등 하반기만 10여개 행사가 몰려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조성된 서울공원에는 지난 여름 자매도시인 서울시 관계자들이 방문해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동상을 세웠다. 우즈벡 민족이 고려인들을 많이 도와준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특히 기념비에 그려진 그림에 우즈벡 아이가 고려인 아이에게 빵을 건네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박 빅토르 회장은 고려인 2세다. 그의 삶도 어느 고려인처럼 고단했다. 박 회장은 "부모님이 이혼해 할머니 손에 자랐고 이웃집 우즈벡 여인 젖동냥으로 겨우 살아남았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할머니가 한국말을 사용해 박 회장도 한국말에 익숙하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카자흐스탄 타라즈의 건축대학으로 진학했다. 군 제대 후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장에서 건설기사로 일했다. 큰 공장이었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기회는 소련연방 붕괴 후 찾아왔다. 전공을 살려 개인 건축회사를 시작했고 회사는 점차 커져 지금은 우즈벡에서 제법 큰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고려인을 위한 문화센터를 만들겠다."

2012년 고려인협회장이 될 때 공약이었다. 당선 바로 다음해 우즈벡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원받아 사업을 시
작했다. 마침 한국 대통령이 우즈벡을 방문했고 공식적인 지원을 요청해 건립비용을 해결할 수 있었다. 공식명칭은 '한국문화예술의집'으로 공연장과 연회장, 게스트하우스, 박물관, 미술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한창 건립공사 진행 중이며 내년 10월 완공 예정이다. 박 회장은 "고려인 역사에 처음 있는 일로 아주 만족스럽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박 회장은 "우즈벡에 고려인들을 위한 의료센터를 짓는 일이 나의 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는 우즈벡 병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시설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또 한국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박 회장은 "이곳에 선진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내가 다 해줄 테니 건물 짓고 병원을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떠나는 고려인을 잡기 위해서는 좋은 일자리와 함께 의료와 문화 등 생활환경 개선이 시급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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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빅토르 우즈벡고려인문화협회장·국회의원

"문화센터 이어 의료센터 세울 것"

'한국문화예술의집' 내년 10월 완공

"고려인들은 뿌리가 없어요. 한국에서 만주·연해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기자생활 40년. 평생 언론인의 길을 걸어온 김 부라트 고려신문 편집장은 요즘 고민이 깊다.

최근 들어 고려인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로 북적이던 고려인 마을에는 이젠 노인들만 남았다. 젊은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러시아로 한국으로 모두 떠나버렸다.

고려인의 위기는 고려신문의 위기로 직결된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은 더이상 시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그는 토로한다.
하지만 박 편집장은 고려신문의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1998년 창간한 고려신문은 내년이면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박 편집장은 삶도 다른 고려인처럼 녹녹치 않았다.

러시아신문사에서 편하게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고려인을 위한 길에 헌신했다. 타슈켄트 국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처음에는 우즈베키스탄항공신문에서 일했다. 그때는 그렇게 러시아 사람처럼 살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는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가 발행되고 있었다. 이후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꿔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1978년 고려일보 주필이 타슈켄트를 방문해 고려인 출신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박 편집장을 비롯한 5명이 모였고, 고려일보에 들어와 고려인을 위한 일을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고려일보 우즈벡 특파원이 됐다.
박 편집장은 고려일보 특파원으로 20년간 일했다.

가장 기억나는 기사로 '고려인 가족 해체'를 다룬 기획기사를 꼽았다. 소련연방시절 돈을 벌기 위해 고려인들은 여러 사람이 투자 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에서 대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양파나 수박 등 특정 작물을 재배해 파는 일이다. 당시 열배 이상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1년이상 외국에 나가면서 아이들은 방치됐다. 방치된 아이들은 각종 범죄에 노출됐고 이혼 문제도 심각했다. 가족 해체가 심각했다. 이런 아픈 현실을 기획기사로 다뤘다. 카자흐스탄기자동맹에서 주는 올해의 기자상도 받았다.

현재도 우즈벡 젊은 고려인들은 좋은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 한국 등지로 떠나고 있다. 한때 해외 송출 중계브로커가 활개쳤다. 한국에 간 고려인들도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월급도 안주고 여권 빼앗는 일부 사장들 문제가 현지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박 편집장의 아들도 한국에서 공부해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도 아들이 한국에 정착해 한국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이곳 고려인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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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마그달리나 고려인 대표가수

"한국 무대에 꼭 서고 싶어요"

26년차 디바 … 트로트·우리 가락도 능숙


"한국에서 꼭 공연하고 싶어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가수 박 마그달리나(52)는 한국 공연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신 갈리나 등과 함께 우즈벡 고려인을 대표하는 유명 가수다.

어릴 적부터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는 그녀는 통역 없이 인터뷰가 가능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했다.

얼마나 유명한 가수일까 궁금했다. 먼저 히트곡을 물어봤다.

대답대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말이 튀어나왔다.

한국말로는 '사랑, 꿈같은 사랑'이라는 제목의 곡으로 그녀는 다수의 러시아 말로 된 히트곡을 가지고 있다.

한국 노래 중에서는 트로트를 특히 좋아한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심수봉 노래가 멀리 우즈벡 땅에서 울린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심수봉 목소리와 잘 맞아떨어진다.
26살부터 가수생활을 했으니 벌써 26년차 가수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녀는 음악선생님 덕분에 노래를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어릴 때는 대부분 러시아 노래를 불렀어요. 주로 러시아 말을 사용하다 보니 러시아 노래가 친숙했지만 나중에 한국말을 조금 알면서부터 한국노래에 빠졌어요."

그녀는 타슈켄트 음악대학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공부를 했다. 대학 때도 노래는 독학으로 익혔다. 졸업 후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나섰다.
한국 전통 민요와 춤을 배우기 위해 전주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고 그녀는 "아리랑 아리랑 ~~~" 우리 가락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앨범을 내지 못했다"며 그녀는 아쉬워한다. 우즈벡 대중가요 시장은 좁다. 한국에서 가수로 성공할 경우 커다란 부와 명예가 뒤따라오지만 우즈벡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는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 80주년을 맞아 다양한 공연이 준비되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들 한국에 가고 싶어하죠."

젊은 고려인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녀도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것과 함께 한국에 간 두 딸이 그곳에서 정착해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특별취재팀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