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야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간첩몰려 돌아가신 뒤 가족얘긴 못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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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살 때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로 강제 이주된 강조야 할머니. 고단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 강조야 할머니가 이주 초기 어려운 시절 생존을 먹었다는 돌피. 논에서 흔히 자라는 잡초다.
▲ 강조야 할머니가 사는 고려인 마을. 지금은 고려인이 모두 떠나고 강 할머니 가족만 남았다.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에 설치된 기념 조각.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초기 토굴을 파고 살던 모습.
강제이주 '산증인' 강조야 할머니

"이주 초기 잡초 '돌피'로 배고픔 견뎌"
고려인 교육열 높아 … 간호학교 졸업
세상 떠난 딸·아들 생각 … 회한 밀려와
"너무 늙어 한국 어떻게 가나 아쉬워"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돌피를 먹으며 살았다오"
5살 때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로 강제 이주된 강조야 할머니(85). 굵게 패인 주름만큼 삶의 무게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지만 고단했던 과거를 회상할 때면 떨림은 더욱 또렷해진다.

강 할머니도 이주 초기 먹을 것이 없어 논에서 자라는 잡초인 '돌피'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린다. 돌피를 몰라 어리둥절 하는 취재팀에서 아들이 뒤뜰에 나가 손수 돌피를 뽑아온다.

한국에서도 흔히 분수 있는, 논밭에서 '피뽑는다'고 할 때 바로 그 잡초다. 벼처럼 조그마한 알갱이를 털어서 말린 후 옥수수 가루와 섞어 쪄 먹었다고 설명해준다.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을 강 할머니는 모두 갖고 있다.

어릴 적 블라딕보스토크에서 살았던 강 할머니는 당시 부모님이 연해주의 큰 농장에서 일해 먹을 것 걱정 없이 지냈다고 한다.

함경도에서 일본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부모님은 어느 날 갑자기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처음 우즈벡 왔을 때는 땅을 파고 뼈대만 올린 작은 집에서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무지 고생했어. 아버지 어머니 원동(연해주)에서 내려와서 모두 힘들었다."

강 할머니의 고통은 이주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 시절 많은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일본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에도 수천명의 고려인 지식인들이 간첩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고 강 할머니의 아버지도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강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돌아가신 후 고향이나 가족얘기를 잘 안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고려인들은 먹고사는 것과 함께 아이들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강 할머니도 공부를 잘해서 도시학교로 유학을 갔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간호학교를 졸업하 후 간호사가 된 강 할머니는 우즈벡 남부지방인 히바에서 일을 했다.

시집은 지금의 우르겐치로 왔다. 4남매를 뒀지만 큰 아들은 모스크바 유학시설 죽었고 딸 한명도 세상을 떠났다. 또 다시 회한이 밀려오는 듯 목소리가 떨려온다. 지금은 둘째 아들 부부와 같이 산다. 아들이 안방에서 가족 사진첩을 꺼내온다. 몇 장 남지 않은 사진 중 특히 강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딱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진 속에는 하얀색 옷을 단정히 입고 단발머리를 한 30세 정도의 젊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1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강 할머니는 러시아어와 우즈벡말, 고려말을 섞어가며 과거의 얘기를 꺼낸다. 3개 국어가 혼용돼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고려말은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곳 우르겐치는 고려인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 중 한 곳이다. 주 전체적으로 만 명 넘게 살았고, 이 마을에도 500여명의 고려인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마을에는 강 할머니 가족만 남았다. "고려사람 없지. 여기 동네에 우즈벡 말만 해서 얘기할 상대가 별로 없어"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너무 늙어서 어떻게 한국 가나. 가까운 시장도 못 가는데···"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인터뷰가 끝나는 취재팀을 배웅한다며 집밖에 나와 의자에 앉으신다.

일상처럼 익숙하다.

집 앞 입구에는 앵두를 닮은 작은 빨간 열매가 매달린 나무가 있다. 이곳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인근 야산에서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강 할머니는 나무를 한참동안 바라보며 회상에 잠긴다. 움푹 파인 깊은 주름살에 고려인 디아스포라 80년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듯하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특별취재팀
/우즈베키스탄(우르겐치)=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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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역사

추위·굶주림 '시베리아 횡단열차' … 1만6000명 세상 떠났다

1864년부터 거주 … 항일운동 요람으로

소련, 고려인 간첩 내몰아 수천명 처형

17만명 열차태워 中亞 각지로 흩어져

공식기록에 따르면 한민족이 연해주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64년부터다. 5년 후, 착취와 기근 등으로 두만강을 넘어간 조선인은 6000명이 넘었다. 1897년에 이르면 그 숫자는 2만6000명에 이른다.
을사늑약에 이은 강제합병이 이뤄진 1910년을 전후하여 우국지사들이 대거 연해주로 건너갔다. 연해주는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1930년대 무렵에는 20만명 넘게 거주하였다. 고려인촌에는 한글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다. 여기저기 학교도 설립되고 고려인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대까지 생겨났다. 1922년 45개이던 한인 학교가 5년 후에는 267개로 늘어났다.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벼농사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이러한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37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과 인민위원장 몰로토프는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해'란 극비명령서에 서명했다. 명령의 핵심은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정부는 고려인들의 반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지도자급 인사 2500여명을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강제이주는 지체 없이 진행됐다. 고려인들은 통보 며칠 만에 연해주의 집결지에 모였고, 이유도, 목적지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짐짝처럼 태워졌다. 그리곤 추위와 굶주림 등 공포 속에서 한 달간 이동했다. 강제이주 다음 해의 기록에 의하면, 이동과정에서만 1만 6000여명이 숨졌다고 한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약 17만명에 이른다. 카자흐스탄에 9만5427명, 우즈베키스탄에 7만3990명,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에 510명 등이다. 소련의 중앙정부가 극동 지역 인민위원회에 전달한 문서에는 고려인들의 동산과 부동산에 대해 보상할 것을 명시했지만 어느 것도 보상받지 못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인민위원회에도 고려인 이주민에 대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고려인을 일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고 치안기관의 감시도 엄격했다. 학교는 폐쇄되고 사회적 진출도 제한받았다.

고려인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풀린 것은 스탈린이 죽고 난 1953년에 가서다. 소련 정부는 처형된 고려인들의 가족에게 '죄가 없다'는 편지 한 장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