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영웅 항일의병장 홍범도, 카자흐서 잠들다
▲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대표적인 항일의병장으로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 크질오르다로 이주돼 1943년 10월25일 세상을 떠났다.
▲ 국학자 계봉우의 흉상.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운동의 혼을 불어넣었고 크질오르다에서는 한글 교재를 만들고 교육시켰다.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홍범도의 거리' 전경. '홍범도의 거리'라고 표지판에 적혀있다.
▲ 쉼켄트의 정치인탄압희생자 추모관 전경. 2층에는 정치탄압으로 남부카자흐에서 처형된 고려인 145명 등 2500명의 명단이 있다.
고려인 3만5000명 이주 카자흐 크질오르다

홍범도 장군 오는 25일에 서거 74주년 맞아

국학자 계봉우, 한글 교재 만들어 교육시켜



취재팀은 카자흐스탄 타라즈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곧장 크질오르다로 출발했다. 타라즈에서 크질오르다까지는 600㎞가 넘는다. 중간에 한 두 곳을 살펴보고 크질오르다 시내의 호텔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되어간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9만5000여명에 이른다. 이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 알마티, 카라간다, 심켄트 등 15개 도시로 분산됐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이주된 곳은 크질오르다로 3만5000여명이다.

'붉은 도시'라는 뜻의 크질오르다는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카자흐자치공화국의 수도였다. 수도가 알마티로 이전되기 전까지 크질오르다는 중심 도시였다.

크질오르다는 고려인들에게도 초기 정착과정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이주인원이 가장 많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고려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한인사회 건설에 매진한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려일보의 전신인 '레닌기치', 고등교육기관인 '크질오르다 사범대학'과 한국어 공연으로 유명한 '고려극장' 등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전하며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고려인 이주의 가장 큰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식량생산 증대다.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도 많은 인원이 집단농장인 콜호즈에 소속됐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의 벼농사 경험을 살려 많은 수확량을 생산했다.

그 결과, 크질오르다는 카자흐스탄 농업생산 홍보영상물에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대표적인 집단농장은 '아방가르드'와 '제3인터내셔널'이었다. 1970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노동영웅은 모두 67명이다. 이중에서 크질오르다 출신은 32명에 달한다. 연해주를 떠난 고려인들에게 크질오르다는 제3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또한, 크질오르다는 애국지사들이 활약한 장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항일의병장인 홍범도 장군이다. 홍 장군은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궤멸시켰다.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이나, 홍범도 일지에는 310명으로 되어 있다. 독립군은 4명만 전사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보복전에 나섰다. 이때에도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일본군 전사자는 2000여명, 부상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

1923년 소연방의 압력으로 무장단체가 해산되자, 홍 장군은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시기에 크질오르다로 이주됐다. 이곳에서 홍장군은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밤에는 고려극장의 경비로 일했다. 고려극장은 1942년 홍범도 장군을 위해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홍범도'를 공연했다. 장군을 흠모하는 고려인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25일,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크질오르다 시내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한글로 '통일문'이라 쓰여진 입구를 들어가니 조그마한 묘역 끝에 늠름한 기백의 흉상이 우뚝하다. 흉상 왼쪽에는 1937년 강제 이주의 아픔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이라고 새겨진 문구가 홍범도 장군의 염원을 알려주는 듯하다.

홍장군의 흉상 옆에는 국학자 계봉우의 흉상도 있다. 계봉우는 한글학자이자 역사가이다.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운동의 혼을 불어 넣었고 크질오르다로 이주하여서는 한글로 교재를 만들고 교육시킨 인물이다.

홍범도와 계봉우 등 고려인들이 잠든 묘역은 들어갈 수조차 없이 갈대만 빼곡하다. 우리의 대명절인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이건만 벌초조차 요원하다. 크질오르다에는 '홍범도의 거리'도 있다. 1994년 고려인들의 청원을 카자흐스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인물이 오히려 타국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홍범도 장군의 항일전 승리는 '날으는 홍범도가'라는 노래로도 불렸다. 이 노래는 독립군과 조선인들의 가슴 속에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10월25일은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74주년이 되는 날이다. 살아서도 만주벌판을 나는 듯 호령한 장군이 이역 먼 타향의 잡초 밭에 묶여 날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모두가 풀어야할 숙제인 것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특별취재팀
/카자흐스탄(크질오르다·쉼켄트)=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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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켄트의 정치탄압희생자 추모관

이역만리서 억울하게 죽은 고려인 145명 이름 이곳에

쉼켄트는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자흐스탄 남부 최대 도시다.

이곳에는 스탈린 시기의 정치탄압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관이 있다. 이 추모관은 카자흐스탄에서는 유일한 곳으로, 스탈린 시대 정치적 탄압을 받고 사형을 당한 희생자를 추모하고 관련 연구를 체계적으로 남기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또한, 당시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의 소수민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무고한 사람에게 간첩혐의를 씌어 사형시킨 잘못된 과거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세워졌다. 추모관을 들어서자 중앙에 희생자를 기리는 상징물이 전시돼 있다.

"검은색은 스탈린 시대의 암흑과 고통을 상징하고, 회색은 탄압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붉은 색은 희생자들의 피를 상징하는데, 전체적으로 그 시대의 고통과 이를 넘어 자유의 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추모관에는 10년 전만 해도 소수민족의 희생자들도 전시돼 있었다. 그 속에는 고려인들도 포함돼 있었고, 초기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사진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자흐인 위주로 전시돼 있고 소수민족 희생자 전시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총 2만7000명이 탄압 받았으며, 1만7000명이 총살됐습니다. 남부카자흐에서만 2500명이 처형됐습니다."

추모관 2층에는 정치탄압으로 처형된 2500명의 명단이 전시돼 있다. 그 중 고려인은 145명에 이른다. 탐사팀은 이역만리에서 일본 간첩 혐의로 처형된 명단을 접하는 순간, 누구라 할 것 없이 애절한 마음에 잠시 묵념을 하였다.

추모관의 누수루 투리바(Nursulu Tuleeva·47)관장은 "본 추모관은 스탈린 시대에 무고하게 간첩혐의로 징역과 사형을 당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2003년에 설립됐다" 면서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희생된 고려인 명단은 아직도 파악이 어렵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