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이 개봉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책장 구석에 묵혀있던 김훈의 '남한산성'을 다시 펴들었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서문에서부터 참담과 슬픔이 옥죄어 오는 잿빛 서사시다. 전편에 흐르는 자기 연민과 수모, 조롱은 못난 조상들만의 차지가 아니라는 상념. 400여년이 흘렀지만 오늘에도 되풀이되는 듯한 섬뜩한 기시감(旣視感). 오늘 우리는 남한산성에 들어앉아 기름진 혀와 붓으로 만리장성을 쌓던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

1636년 동짓달, 청 태종 홍타이지는 15만 대군을 몰아 조선 정벌에 나선다. 대륙에서는 노쇄한 명나라가 여진족의 청나라에 밀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중화(中華)와 사대(事大)에 절은 조선의 먹물들은 '오랑캐'론으로 일관했다. 국가 생존을 위해 청나라와의 관계를 다져가던 광해군은 쫓겨났다.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게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신 정권은 '청과의 전쟁 불사'를 호언했다.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명나라를 섬기는 것만이 길이요 생명이었다. 

청나라 기병들이 얼어붙은 강물 위로 말을 달려왔다. 파죽지세, 무인지경이었다. 적장 용골대는 '너희가 선비의 나라라더니 어느 곳에서도 아무도 맞는 자가 없었다'고 조롱했다. 경기도 광주 쌍령리에서는 청의 기병 선봉대 33기가 2만의 조선군을 궤멸시켰다. 강화도 길도 막혀 이제 갈 곳은 남한산성 뿐이었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더 모질게 싸워-
-기름진 말들만 창궐해 굶주린 성에 넘쳐나-
-남한산성 47일의 참담과 슬픔이 데자뷰로-
-말잔치 그만 거두고 냉엄한 현실 인식을-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다케다 신겐은 "사람이 곧 성이고 성벽이며 해자다"라고 했다. 지상에 난공불락의 성은 없다는 얘기다. 아예 성을 버리고 도읍의 저택에 거주하며 전쟁을 나갔다. 조선의 조정은 궁벽한 성에 틀어박혀 밑도 끝도 없는 말싸움으로 날을 말렸다. '문장으로 몸을 일으킨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다.'

청 태종이 남한산성으로 글을 보낸다.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어놓고 머리만을 굴속에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려느냐.' '토굴에 들어앉아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산성 안에서는 말이 말을 휘감고 춤을 췄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베어 내걸어야 한다'에서부터 대포에 맞설 투석전 토론까지 주제는 넘쳤다. 어느 날은 젊은 당하관들이 몰려와 최의 목을 치라며 엉머구리처럼 임금을 조른다. 이들을 쫓아내는 군사들을 향해 임금이 말한다. "그냥 둬라. 저들은 저래야 저들일 것이니." 마지막 날이 왔다. 왕자들이 피신한 강화도가 짓밟히고 남한산성 성벽 2곳이 대포로 뚫린 뒤다. 임금이 삼전도를 찾아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찧었다. 이 자리에 한양 사대부가에서 끌려 온 수백명의 여인들이 축하의 춤을 췄다. 

기시감은 과거 어느 기억에 오늘이 겹쳐 보이는 현상이다. 남한산성의 후예들이어서인지 말이라면 여전히 부족함이 없다. 핵강국을 자부하는 북한은 대화 제의에 '제 푼수도 모른다',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야유한다. 이 와중에 건국절 논쟁이라니. 1919년이든 1948년이든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겠는가. 임시정부가 건국이라면 그 나라는 왜 꽃다운 젊음들을 위안부로, 군함도로 끌려가게 두었는지. '김정은은 신세대 사고로 한반도 평화에 기여해야'에 당사자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청 대종은 남한산성에 보낼 문서를 지으라며 명한다. "말을 접지도, 구기지도 말고, 오직 펴서 내질러라." 이제 말잔치는 그만 됐다. 핵개발에 일본은 3개월, 한국은 6개월이라고 했던가. 일본은 어디선가 벌써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잔치에 빠졌다가 다시 군함도로 끌려갈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