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지난 6일 개최된 인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최 인권캠프 '소통과 공감'에서 인권 강연을 하고 있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지난 6일 인천을 방문했다. 인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인권캠프 '소통과 공감'의 인권강연을 위해서다. 박래군은 인권 강연과 세월호 관련 행사 참여 등을 위해 매년 두세 번 인천을 방문한다. 인천사회복지회관이 있는 동암역 주변 지리도 밝다. 그런데도 그가 인천에 오는 날이면 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지난 30년간 온몸을 던져 인권을 지키는데 앞장선 탓이다. 덕분에 5번의 수감생활과 10개가 넘는 전과를 갖게 됐다. 박래군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줄 곳 경기도에서 생활했다.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안양에서 결혼해 지금은 부천에서 산다. 인천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처음 노동운동에 뛰어든 곳이 바로 인천이다. 부평의 한 목장갑 공장에서 일하며 인천노동운동연맹(인노련) 소속으로 활동했다. 86년 인천 5·3 항쟁 때는 해고자 신분으로 참여해 화염병을 나르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의 동생 박래전 열사는 박래군이 인권운동에 투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래군의 설명하는 인권이야기와 박래전 열사, 인천과의 인연 등을 짧은 지면을 통해 살펴본다.

● 문학청년에서 운동가로

박래군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다. 하루 두 번 버스가 들어갈 만큼 외진 시골동네였다.
버스시간을 놓치면 산길과 염전을 지나 몇 시간이고 걸어야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도청 소재지인 수원으로 진학한 뒤, 81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인기작가 공지영과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우상호가 대학 동기이자 절친이다.
문학청년을 꿈꾸던 박래군은 1학년 때 '땅강아지'라는 단편소설로 교내 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80년 시국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곧바로 학생운동에 뛰어 들었고 강제로 끌려가 군 생활을 마친 뒤, 부평에서 노동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후 한미은행 점거사건에 가담하는 바람에 86년 첫 수감생활이 시작됐다.

● 동생 박래전의 죽음

박래군의 인권운동은 두 살 터울의 동생 박래전 열사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전은 88년 6월 대학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했다.
광주학살의 주범 노태우의 집권과 공안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박래군은 동생의 죽음 앞에서 "새 세상을 만들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곤 30년 가까이 오직 인권만을 위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박래전의 이름을 불렀다.
"광주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희생과 헌신을 기린다"며 그를 호명한 것이다.

● 고난으로 점철된 인권운동

박래군은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현장을 지켰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에바다 농아학교, 용산 철거민 대책위, 쌍용자동차 투쟁에도 함께 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국장직을 맡았지만 8개월 만에 뿌리쳤다.
그리곤 평택 대추리와 제주 강정마을 투쟁현장으로 돌아왔다.
용산참사 때는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세월호 침몰 뒤에는 4·16연대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는 사이, 말 그대로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 했다.
지난해 1월22일에 가서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섯 번째 수감 생활을 마쳤다.
지금은 '인권재단 사람'의 소장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4·16 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박래군과 인천

박래군이 처음 노동현장에 발을 들여 놓은 곳이 인천 부평이다.
야학을 할 요량으로 85년 10월 인천에 발을 디뎠지만 근거지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86년 초 부평의 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명문대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막 올라온 것 같은 외모 덕이었다고 한다.
이후 공장 몇 곳을 옮겨 다니다 목장갑을 만드는 대진산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두 달 다니던 공장에서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았다.
전두환 철권통치 속에서도 호기 있게 파업을 하고 짧은 시간 점거농성도 했다.
이 때 우연히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같은 대학 동기인 송영길 전 인천시장을 처음 알게됐다.
그해 5월 3일에는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5·3 인천항쟁이 불붙었다.
당시 박래군은 고물장수로 위장해 화염병을 시위현장에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항쟁 현장에서는 투석전을 준비하던 동생 래전이를 만나 얼싸안기도 했다.

● 박래군의 인권이야기

박래군의 인권 강연은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는 "국가의 폭력과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이 모든 사람의 열망"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폭정과 억압에 저항해 온 역사가 인권이 걸어온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인권은 가해자와 피해를 받는 약자·소수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에서는 개인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는 여성이 '인권의 주체'가 된다.
이처럼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와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가 그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인권을 이해하는 인권감수성을 키워야한다"고 주문한다.
박래군은 특히 "인권은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누군가 절실한 사람이 요구하고 싸우면서 이를 보편화할 때 성취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박래군은 위안부 소녀상 옆 빈자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날 강연을 정리했다.
"옆자리를 비워 놓은 것은 누군가 소녀 곁에 앉아서 얘기를 들어주라는 의미"이라고 말했다.
"인권의 시작이 바로 약한 자의 곁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행동을 통해 '몫이 없는 이들의 몫을 찾아주는 일', '더불어 사람이 되는 일'이 인권"이라고 역설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