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가을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 9월 초순의 선두평야가 겨자색을 띠기 시작했다. 머잖아 선두평야엔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그 물결은 맛있는 강화섬쌀을 생산해낼 것이다. 선두포에서 바라본 선두평야 전경.
▲ 선두포의 가을이 시작됐다. 선두포 여인들이 참깨를 털어내고 있다.
▲ 심상점 선두2리 이장
한때 가장 갈망하는 음식 '쌀' 이젠 넘쳐나
9월, 추수·장담그기 분주 … 술 담가먹기도


선두포 평야가 시나브로 겨자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강화의 들녘도 그랬다. 카키빛이던 염하는 옥빛을 띠고 있었다.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본 1947년 9월의 논은 황금빛이었다. 그는 "9월은 모든 이들이 수확의 즐거움을 누리고 수확 전날 사람들은 작은 숫돌로 낫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남성들은 함께 일하고, 여성들은 그들을 도우며 어린아이들 역시 함께 따라다닌다"고 묘사했다.

오스굿에 따르면 젊은 남성들은 낫으로 벼를 베었으며 노인들은 벼를 말리기 위해 벼를 얇게 펼치는 일을 했다. 노인들이 논 옆에 쌓아놓은 볏단은 3일~10일 햇볕에 말렸으며 나중에 젊은 남성이나 소가 집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추수 기간에 논에 떨어진 벼를 모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수확한 벼는 타작과 도정을 거쳐 밥상에 오른다. 당시 쌀은 가장 먹기를 갈망하는 음식이었다.

밥을 짓기 위해 쌀은 커다란 바가지에 담아 보통 세 번을 씻었다. 첫 번째로 씻은 뜨물은 돼지먹이로 쓰고, 이후 쌀 위에 4번째로 물을 붓고 흔들어 일어낸 뒤 쌀을 다른 바가지에 떠 넣었다. 이 과정에서 돌을 골라낸 뒤 쌀을 화덕이 걸린 쇠솥에 붓고 120%의 양이 되도록 맑은 물을 넣었다. 뜸을 들이고 숭늉을 만들어 먹는등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당시 쇠솥에 밥을 지었다면 지금은 압력밥솥이나 전기압력밥솥에 밥을 짓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당시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와 감자를 섞은 밥을 먹었고,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보리와 쌀의 비율을 3대1 정도로 섞어 먹었으며, 부자들은 쌀밥만 먹었다. 마을농부가 아침식사로 먹는 보리밥의 양은 엄청났다고 적고 있다.

선두포의 가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드는 계절이기도 했다. 고추장을 만들 때는 찹쌀가루, 명태와 도라지 가루를 넣기도 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쌀가루 대신 수수 혹은 기장으로 만든 가루를 사용했다. 간장 역시 가을에 만들었다. 메뚜기를 통째로 구워서 간장과 섞어먹는 음식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메뚜기는 서울의 상류층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삶은 누에(번데기)도 아이들에게 좋은 영양분이었다.

선두포 사람들이 마시는 술은 크게 세 종류였다. 막걸리와 약주, 소주가 그 것이다. 오스굿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중요한 세금을 만들어내는 술을 전매품으로 통제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한 이후 각 가정에서 마시는 술은 개인적인 생산이 허락됐다. 소주는 시장에서 팔았으나 막걸리, 약주와 같은 술은 주로 할머니들이 담갔다. 목화는 3년에 한 번씩 밭에 심었고 아주까리 역시 밭 가장자리에서 재배했다. 아주까리 열매는 절구에 빻아 끓여 기름을 만들어 변비약과 여성의 머릿기름으로 사용했다. 담배는 여전히 개인적으로 재배할 수 없으며 인삼은 선두포에서 재배되지 않았다.

오스굿은 '마을의 경제와 삶' 챕터 마지막 문단에서 "최근 선두포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어른이 상당한 투자를 통해 근처 해안가에 염전을 만들었는데 몇 달 만에 자본의 60%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며 "소금을 만드는 법은 그 달 바닷물이 간조가 될 때 염밭을 일구는 것이다. 며칠 간 진흙바닥을 건조시킨 뒤 구역 낮은 구석에서 옆면이 약 15피트 가량의 공지를 파내고 낮은 흙으로 그 공지를 둘러씌운다. 바닷물이 쟁기질된 평지를 넘쳐나서 그 윗부분으로 흘러들면 소금기 가득한 물을 퍼내 물이 증발될 때까지 커다란 철제 탱크에서 끓인다. 가장 큰 비용은 한 탱크의 소금물을 끓이기 위해 불을 때는 80묶음의 소나무 장작값"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의 선두포는 기름진 쌀이 넘쳐난다. 메뚜기를 구워서 먹는 사람들도 없다. 보리밥이나 감자, 옥수수는 주식이 아닌 별식으로 즐길 뿐이다. 문제는 농사를 지어 기계값, 용역값을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쌀소비가 주는 데다 쌀값마저 너무 싸서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두포 사람들은 여전히 농사에 전념한다. 평생 배우고 본 것이 농사인 것이다. 지금부터는 배추를 심는 시기이다.
2008년 이후 가축을 기르는 곳은 없다. 고추장과 된장은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담근다. 염전에 대해선 현재 토박이 생존자 가운데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한 농부가 익어가는 선두포평야를 바라본다. 여름내 애썼던 구릿빛 농부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심상점 선두2리 이장, 마을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 누구나 엄지손가락 '척'


심상점(60) 선두2리 이장을 만난 건 4일 오후 열린 '강화종합리조트' 기공식에서다.

'1947 선두포, 강화의 어제와 오늘'을 취재하며 줄곧 심 이장의 도움을 받았는다. 그 때마다 그는 현장에 있었다.

"오전엔 누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관하느라 다녀 왔어요."

오전은 바쁘다고 해서 오후에 약속을 잡았던 터였다. 그런데 역시 마을일이었다.

심 이장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청구서 등을 읽어드리는 소소한 일에서부터 농삿일까지 마을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인다. 선두리 주민들이 심상점 이장 하면 누구라도 엄지손가락 먼저 '척'하고 들어올리는 이유다. 물어보는 사람마다 그랬다.

선두리엔 귀촌한 가구들, 외지인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이 선두리의 삶에 잘 적응할 수 있고 마을 주민들이 그들에게 문을 활짝 열도록 가교역할을 놓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인천 남구 용현동이 고향인 심 이장은 양돈사업을 위해 88년 귀농했다. 이후 20년 간 선두포에서 양돈사업을 했다. 사업을 접은 건 2008년이다.

"주변에 펜션이 생기고 점점 개선되는데 돼지를 기르는 일이 괜히 미안해지더라구요. 제가 문을 닫은 후 가축을 기르던 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셨지요."

선두2리 이장을 맡게 된 때도 이 때부터다.

"처음엔 토박이 분들이 해야 한다고 극구 고사했는데, 마을 분들이 워낙 강경하게 말씀하셔서 결국 수락했습니다."

꼭 2년만 하기로 했던 그였다. 그러나 마을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고, 어르신들을 형님이나 부모처럼 살갑게 대하는 그를 선두리 주민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일했고, 지난해엔 이장단 단장까지 맡았다. 실제 그를 말하는 선두리 주민들은 누구라도 엄지손가락 먼저 '척' 들어 보인다. 무조건 최고라는 것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