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우리들의 이야기' … 30년전 민주주의 향한 외침
▲ '1987 우리들의 이야기' 입구를 지키던 '인천 항쟁도'는 만화가 이정수 씨의 작품이다. 6월 항쟁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투쟁 지역을 만화로 표현했다. 답동성당, 동인천역, 인하대, 인천대, 부평역, 4·5·6공단과 민중교회인 백마교회와 인천산업선교회가 주 무대다. 6월 항쟁이 시작된 곳은 부평역 광장과 인천 답동성당이다. 한해 전에 전개된 5·3항쟁도 이 곳에서 벌어졌다. 6월10일 오후 4시, 답동성당과 부평지역에서 국민대회 참가를 촉구하는 가두방송이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부평역으로 몰려들었다. 인하대 학생 1000여명도 시민회관을 거쳐 부평역까지 도보로 행진했다. 부평역 시위의 시작을 알린 것은 나무십자가를 든 백마교회 신철호 목사다.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빵과 음료수를 건넸다. 지나가는 버스 속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시위대는 계속 늘어나 백마장 입구까지 가득 메웠다. 저녁 8시에는 청천동 영아다방 사거리에서 집회를 열었다. 15일에는 8000여명의 인하대 학생들이 시민회관 앞 주안사거리까지 거리를 휩쓸었다.
▲ 전시장 한쪽 벽면을 장식한 가로 12m, 세로 2.5m 크기의 대형 걸게 그림은 인천민족미술인협회 회원들이 공동으로 제작했다.
● 1987년 민주항쟁의 시작

'1987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해 1월부터 6월까지의 상황을 월별 회고로 풀어 나간다.

1월의 첫 머리는 어느 하숙집 아주머니의 회고가 자리 잡았다.

"오늘은 동네가 너무 조용해서 을씨년스럽네요, 경찰 물고문으로 대학생이 죽었다는 뉴스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1월14일 새벽 2시 서울대생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몸에서는 폭행과 물고문, 전기고문 때문에 생긴 19곳의 피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검안의사의 증언과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추악한 진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 1986년 인천 5·3 항쟁

87년 6월 항쟁은 한해 전 인천에서 벌어진 5·3 항쟁과 맞닿아 있다.

1986년 5월3일,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인천 주안 시민회관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개헌운동 열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인천시지부 결성대회 자리였다. 이 집회는 이미 광주, 대구 대회를 통해 수많은 인파를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인천대회에도 수도권 전역의 학생들과 노동자, 시민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야만적인 폭력진압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에 극력 저항했으나, 언론과 방송은 연일 '폭도의 난동'으로 왜곡했다. 군사정권은 항쟁을 빌미삼아 민주인사 319명을 연행해 129명을 구속하고 37명을 수배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부천서 형사 문귀동은 권인숙 양을 성고문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인천 5·3 항쟁은 6월 항쟁의 출발점이자,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첫걸음으로 평가받고 있다.

●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선언

2월 들어서도 전두환의 철권통치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박종철 추모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무더기로 연행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도 계속했다.

권인숙 양을 성고문한 문귀동에게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 민중의 분노를 자아냈다.

3월에는 3·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펼쳐졌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겠다"는 직선제 열망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4월13일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기존의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축소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 이한열의 죽음과 6월 항쟁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연세대 학우들과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한 직후였다.

"하더라도 뒤에서 해라,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앞에서 했더라고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오열했다.
직선제 쟁취를 위한 민중의 항쟁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요원의 불길로 번져 나갔다.

6월10일 개최된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도시에서 약 24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했다.
경찰의 진압도 한계를 드러냈다.

서울 명동성당으로 몰려간 시위대는 15일까지 계속된 점거농성을 통해 성난 함성을 쏟아냈다.
6월18일에는 이태춘 씨가 최루탄을 뒤집어 쓴 채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6월26일 국민운동본부는 6월 항쟁의 절정이 된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했다. 전국 34개 도시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10만명의 경찰병력으로는 진압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침내 6월29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조치를 담은 '6·29' 선언을 발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피 흘린 민중의 희생이 7년 만에 그 소망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 그해 6월의 인천

4·13 호헌 조치가 발표되자 인하대와 인천대 학생들의 시위가 불붙었다.
인천교구 사제 39명은 4월 30일 인천 답동성당에서 '민주개헌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다.

5월6일부터는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5월1일에는 천주교 인천교구 청년회를 비롯한 신자 1천여 명이 기도회를 개최했다. 인천지역 인권선교위원회는 5일부터 인천제일감리교회에서 무기한 금식기도를 돌입했다.

항쟁 당일인 6월10일 오후 6시를 기해 인천지역 택시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공동행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민주화를 열망하는 인천시민들은 6·29선언을 쟁취하는 순간까지 인천 전역에서 범시민운동을 이어갔다.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

/사진·자료제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인천민주화운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