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 선감원에 전국에서 부랑아로 분류된 청소년 수백명이 수용되었다. 명목은 직업훈련을 시켜 사회에 적응토록 한다는 것이었으나 노동력 확보와 학대뿐 이었다. 최소한의 의식주는 물론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 마저 박탈되었다. 견디다 못한 몇몇이 해상탈출을 기도했으나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들 끌려온 소년들이 몸부림치며 일인 교도관에게 항거한 사실을 극화, 모방송국에서 지난해 8·15 특집극으로 방영한바 있다.
 그것은 실화였다. 선감도에 부랑아 수용시설 선감원이 들어선 것은 일제 말기인 1941년 10월이었다. 경기도사회협회의 기부금으로 섬 전체를 매입, 시설을 갖춘 뒤 이듬해 봄 부랑아 195명을 수용 개원했다. 당시의 교관은 교사 교도관 순사 등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한 때 정지했다가 46년 경기도가 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경기도는 54년 미군의 원조로 총 41동에 건평 1천8백37평 규모의 대폭적인 시설을 하여 선감학원이라 이름하고 부랑아들을 수용했다. 수용 아동수는 74년 295명이던 것이 차츰 줄어 79년에는 130명이었다. 그들은 대개 걸인 이거나 고아, 가정파탄으로 뛰쳐 나온 가출소년이었다.
 학원에서는 부대사업을 운영 자체수입도 도모했다. 그것은 굴양식장과 축산업 그리고 전도가 국유지였던 만큼 주민들은 농지를 임대해야 했다. 당시의 소위 480양곡과 세계기독교봉사회의 원조물을 이용 간척사업도 전개했다. 그러니 자연 부조리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전히 탈출기도자들의 익사사고도 발생하고 강제수용도 있었다. 80년대에 이르러 동 학원은 폐쇄되었다.
 선감도는 인천항에서 서남으로 30여㎞ 거리의 작은 섬이다. 예전에는 인천에서 객선으로 대부도에 닿아 나룻배로 건넜다. 하지만 지금은 안산시 대부동에 속해 있으며 시화지구 사업으로 육지와 연결 인천서도 수원서도 차량편으로 오갈 수 있다.
 그 섬에 지난 9일 청소년수련원이 개원했다. 경기도가 백억원을 투입 8만7천평 규모로 마련했다. 초대원장도 언론인 출신 이어서 반갑고 기대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