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이 명하노니, 헌법은 국민을 따르라
▲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다, 새얼문화재단, 432쪽, 9000원
자유·평등·행복 갈망… 발칙한 미래 사회 상상

국민이 만드는 헌법·'노동 시간의 민주화' 제시




<황해문화> 가을호(통권 96호)가 특집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다'를 준비했다.

5월 장미 대선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촛불항쟁의 한 매듭이 지어졌다. 촛불항쟁은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종식과 민주정권 수립을 통한 정상국가 회복이라는 단기적 목적을 넘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훨씬 더 장구한 미래전망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황해문화> 가을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나가야 할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며, 더 행복한 공동체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상상하자는 취지로 이번 특집을 준비했다. 여기엔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미래가치를 담보할 헌법의 모습과, 그 실질적 내용인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노동, 새로운 사회상에 대한 상상이 들어있다.

이 어쩌면 아직 '발칙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새로운 상상들은 하지만 이미 지난 촛불항쟁과 그 이후의 우리 사회 내부에서 준비되고 성숙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상상을 현실태로 만드는가 못 만드는가에 우리 사회의 장래의 성패가 달려있는 셈이다.

우리 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공동체 최고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에 대한 두 개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우리가 꿈꾸는 나라'의 이념형으로서의 헌법에 대한 상상이며, 또 하나는 가까운 미래의 공동체의 삶을 위한 구체적 토대로서의 현실적 헌법에 대한 상상이다.

김현철(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장전을 위한 헌정투쟁'은 헌법이란 기본적으로 지금 존재하는 나라의 틀이 아니라 우리가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나라의 틀이며, 그 나라의 틀은 국회나 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한국민'이 직접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국민적 차원에서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헌정투쟁'의 결과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전제 아래 이 글은 인종, 성별, 장애, 문화,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이 없는 평등한 나라.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 주거권, 건강권 등 삶의 질이 보장되는 나라. 재산과 권력과 명예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존중과 배려가 있는 나라. 생명과 생태가 존중되는 나라. 미래 세대를 보호하는 나라. 군사적 위협과 일상의 폭력 없는 평화로운 나라. 더 많은 참여와 의사표현이 보장되는 나라. 헌법적 가치가 언제나 구현되는 나라 등 새로운 헌법전에 명기되어야 할 기본사항들을 제안한다.

홍석만(민중언론 <참세상> 발행인)의 '장기침체와 디지털 전환시대의 헌법'은 새로운 헌법은 신자유주의체제와 자본주의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 현재의 '협약민주주의'의 한계를 넘는 촛불혁명의 완성, 디지털 사회경제의 도래와 새로운 노동가치 형성에 따른 사회경제질서의 재구성 등의 내용이 담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태원(황해문화 편집위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의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이후 극소수의 수혜세력을 '갑'으로, 삶의 모든 부면에서 소외와 퇴락의 운명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절대다수를 '을'로 지칭한다.

이 '갑'과 '을' 사이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철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제까지의 국민국가 차원에서의 민주주의 논의는 이러한 새로운 계급상황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진단하며 기존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들을 '을을 위한, 을의 의한, 을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급진화할 것을 제안한다.

김영선(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의 '시간의 민주화를 위하여-과잉노동 없는 사회를 위한 기획과 실천'은 인간에게는 자신과 주변, 지역공동체와 사회 전체를 성찰한다. '다른 삶'을 향한 열망을 위한 자유로운 여가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런 전제 하에 오랫동안 당연시되어 온 장시간 노동의 폭력적 시간체계를 넘어서고 그 이후의 사회를 설계하는 기획이자 실천을 '시간의 민주화'라 명명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노동시간의 단축보다 노동량의 단축의 실현, '장시간 노동=성실'의 신화 대신 여가나 휴식에 우선 가치 부여, 기본급 및 통상임금을 확대와 포괄임금제 거부, 장시간 노동을 재생산하는 각종 제도-포괄임금제, 근로시간 특례업종, 휴일 및 연장근로, 근로기준법 예외조항 등-의 폐지, 자급자족형 생활문화운동 확산과 '자기 돌봄'의 윤리 강화, 상시 노동체제 가속화하는 신기술 통제 및 '연결되지 않을 권리' 확보, 경쟁과 장시간 노동 유발하는 각종 성과 평가장치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낭비적인 생산력 과잉과 더불어 생산수단 발전을 통한 노동성격의 변화가 급격히 진행중인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장시간 과잉노동이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라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 되고, 이 새로운 상식으로부터 인간해방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변화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전망'에 대한 비평도 눈에 띈다.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단언하는 정욱식(평화 네트워크 대표)의 '핵 억제는 핵을 억제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해소와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정책에 숨은 문제점들을 차분히 점검하는 김철식(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전문연구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 대량해고와 고용위기를 반복하는 조선산업 구조조정 악순환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허민영(경성대 경제금융물류학부 초빙교수)의 '조선산업구조조정과 일자리 해법'은 '민주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쉽게 풀려나가기 힘든 우리 사회의 다양한 당면문제와 현상들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특별좌담으로 준비된 백원담 교수(<황해문화> 편집위원,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와 저명한 냉전 연구자인 오드 아르네 베스타(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교수)의 대담 '북핵, 냉전, 동아시아, 세계'는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핵 국면을 동아시아 냉전, 혹은 열전이라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소설가 김남일이 아시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연구를 아시아 각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기행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새 기획연재 '스토리텔링 아시아'도 불거리다.

70년대 중반, 한 가난한 소녀의 눈에 비친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강렬한 농촌의 풍경과 사람살이가 숨 가쁘게 펼쳐지는 공선옥의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과, 고골리의 아까끼 아까끼비예치처럼 가혹한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서 중음신처럼 이승을 떠도는 불행한 택배기사의 이야기가 담긴 안보윤의 '이토록 사소한' 등 두 편의 단편소설과 신현수, 박일환, 임선기, 이설야, 김명남 등 다섯 시인의 시편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담아낸 사진작가 김흥구의 포토에세이 '이주노동자의 아리랑'은 이번에도 <황해문화> 문예란에 팽팽한 장력을 불어넣어준다.

전성원 편집장은 "이 가을, <황해문화>를 읽는 이들 모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움직이듯,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희망이 움직이듯, 숲에서 사막으로 사랑이 움직이듯, 그렇게 저절로 한 걸음 더 움직이는 삶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32쪽, 9000원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