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아동 돌봄 20년 … "제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 입니다"
▲ 정미숙 경기도장애인법정개인시설협회 회장이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버림·학대 상처받던 아이들

한 명·두 명씩 보살피기 시작

자금 마련위해 아르바이트도

법인 전환땐 5배 지원금 수령

출연금 기준완화 간절히 소망


1999년 10월 어느날, 포천시 한 주택. 이곳에서 지적 장애아동을 돌보던 한 여성은 이날 "내가 죽을 때까지 이들을 책임지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을 엄마로 생각하는 장애아동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비를 털어 장애아동들을 보살폈다. 지원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금난도 뒤따랐다. 부족한 자금을 채우기 위해 새벽녘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어떠한 시련에도 '다짐'을 저버리지 않았다. 십수 년이 흘렀다.

그에게는 1억 원 이상의 빚이 생겼다. 그는 왜 고난을 자처했는가. 그는 오로지 고운 연둣빛 새싹 같은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살기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이 돌보는 지적장애인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연일 포천에서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우연'으로 시작한 장애아 돌봄이 '운명'이 돼버린 정미숙(49) 경기도장애인법정개인시설협회 회장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27일 만난 정미숙 회장에게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하신거죠?"라고 다짜고짜 물었다.

그는 "힘든데 이 일을 왜하냐고요? 기자님은 힘들다고 자식을 버릴 수 있나요.. 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제가 힘들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설을 폐쇄한다면 여기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는 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가족 이상의 존재라고 답했다. 삶이 힘들때 버팀목이 돼주거나, 기쁨, 슬픔 등의 감정을 함께 나누며 인생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존재 말이다.

"장애아동들과 짧게는 5년, 길게는 15년 이상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내 인생에 있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정 회장이 장애아동을 처음 돌보기 시작한 것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장애인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온 몸에 멍든 아이를 발견한다.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이 아동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학대당하는 등 상처받는 장애아동을 수 없이 만난 것이 정 회장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는 '내가 직접 집에서 이 아동들을 돌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다. 자신의 집에서 상처받은 지적장애 아동들을 하나, 둘씩 보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생활이 점차 힘들어졌고 환경도 매우 열악해졌다. 자비로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고, 장애 치료에 특성화된 교육을 시켜 장애개선에 도움 주고 싶지만 역부족이었다. 환경이 너무 열악해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먹고 자는 일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설에 거주하는 지적장애인들을 볼 때마다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다."

국가 지원 없이 자비로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운영자금이 턱 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모자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틀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비용으로는 장애아동들을 돌보는데 한계에 이르렀다. 지적장애인들은 장애 특성에 맞게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다양한 프로그램도 개설하지 못했다. 또 시설 인원이 점점 늘어나 사회복지사도 추가로 고용해야 했지만 어려웠다.

정 회장은 "어려움을 겪던 중 뜻밖에 희망이 생겼다. 정부가 개인 운영 장애인 시설의 지원근거를 마련해 주겠다고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있을 무렵인 2002년 당시 미신고시설로 운영되던 장애인 거주시설이 정부가 정한 자격을 갖춰 신고(합법적)시설로 전환한다면, 지원금을 주기로 계획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격을 갖추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규정에 맞게 건물을 증축했고, 사회복지사도 추가로 고용했다. 아이들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8년을 버텼다. 2010년 합법적인 시설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지자체와 경기도에서 예산부족 등의 이유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정 회장은 지자체, 경기도, 복지부, 기재부 등을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담당자들을 설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을 찾아다닌 끝에 지원금을 받게 됐다. 그러나 지원금은 법인장애인거주시설 대비 15% 수준으로 매우 열악했다.

정 회장은 "법적근거를 마련해 지원금을 받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운영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법인화 전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법인화된다면 지금보다 5배 이상 늘어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2010년 신고시설로 전환된 장애인거주시설들은 개인시설에서 법인으로 전환하려면 까다로운 자격을 갖춰야했다. 법인화를 위해 수억 원 상당의 현금 출연은 넘기 힘든 난관이었다. 대부분의 장애인거주시설 운영자들은 자금난으로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큰 돈을 마련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출연금을 낮추기 위해 2015부터 경기도와 수차례 협의했고, 끈질긴 설득 끝에 법인 전환에 필요한 출연금 기준을 5000만원(20인 기준)으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 방침은 올해 시행예정이었다. 그러나 장애인 단체가 "각종 비리를 양산하는 장애인시설단체의 법인화 문턱을 낮춰주는 일은 부적절하다. 장애인 거주시설을 없어져야 한다"며 반발하면서 경기도의 법인전환 기준 완화 방침 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정 회장은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살아왔는데 비리 단체로 치부되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또 간절히 바라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언제까지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법인 전환에 필요한 출연금 기준을 낮춰서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교육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이경훈 기자 littli18@incheonilbo.com


스무살 봉사활동, 인생바꾼 전환점

남편도 이해 … 전문성·경험 키워

20년 가까이 장애인 거주시설을 운영하는 정미숙(49) 경기도장애인법정개인시설협회 회장은 스무 살 젊은 나이 봉사활동을 하다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미용을 전공한 정 회장은 자신의 재능을 살려 장애아동들을 이발해주는 봉사활동이 계기가 됐다. 그는 봉사활동 중 지적장애아동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됐고 봉사활동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1993년 결혼한 그는 같은해 남편의 고향인 포천시로 이사와 신혼집을 차렸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그가 포천시로 이사온 뒤에도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99년부터 자신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장애아동을 돌봤다. 남편도 장애아동을 돌보는 일을 흔쾌히 허락했다. 그의 남편도 지체장애를 겪고 있어 장애 아동들의 아픔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회복지가 전공이 아니었던 그는 장애시설 운영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복지 관련 서적을 읽고,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2004년 포천시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시설을, 2006년도에는 법인중증장애인시설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우연으로 시작한 장애아동 돌봄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됐다.
정 회장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을 걸만한 일을 찾기 힘들다고 들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에 인생을 걸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경훈 기자 littli18@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