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전사로 군복무 시절 문재인.
두 번의 도전 끝에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 당선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손잡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사회적 약자 편에 섰던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영광을 안으며 '정권 2인자'로 등극했지만, '폐족 친노(親盧)'라는 두 단어는 그에게 '주홍글씨'가 됐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와 서거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자의 반 타의 반' 현실정치에 몸을 담근 문재인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정치 신인' 티를 벗으며 와신상담한 건 이때부터다. 제1야당 대표를 거치며 분당(分黨) 사태로 무너지던 당을 재건해 지난해 4·13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마침내 그는 탄핵정국 속에서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안고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어머니 연탄배달 돕던 소년
문재인은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부모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미군 함정에 몸을 실었던 게 남한 정착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양동이를 들고 긴 줄을 서야 했던 가난은 여전했다. 모친의 연탄배달일을 돕다 리어카 채로 길가에 처박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만 했다. 명문 경남중·고에 입학했다. 재수로 입학한 경희대 법대 시절엔 '반유신' 운동권이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관계자들의 사형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를 이끌다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
제대 직후 부친을 잃은 회한으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려 1979년 사시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부마항쟁과 10·26, 12·12 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됐다. 2차시험 합격 소식을 들은 곳은 유치장이었다.

▲연수원 '차석' 판사 좌절…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사시 합격으로 난생처음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고,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좌절됐다.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부산행을 택했다. 1982년 노 전 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다. 6월 항쟁 때인 1987년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시 노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그는 상임집행위원을 맡으며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노 변호사는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들어섰지만, 문재인은 노동문제 변호사 길을 이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재인은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두 사람은 재결합했다.

▲참여정부 '왕수석'…盧곁 지킨 '친노적자'
문재인은 참여정부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총선에 출마하라는 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불편함이 커진 탓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1년도 못하고 물러났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향했던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노 대통령 탄핵 소식에 중도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심판 기각 후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민정수석으로 옮겼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비서실장을 맡으며 '동지 노무현'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 겸 대변인으로 적극 방어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장례를 도맡았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했다.

▲'정치신인' 대선후보에서 '적폐청산 기수'로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2009년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선과 이듬해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현실정치와 선을 그었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야권대통합 과정에 뛰어든 문재인은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된 뒤 대선후보로 나섰다.
안철수 후보와의 우여곡절 끝 단일화로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박근혜 후보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인고와 침잠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2014년 12월 당 대표에 출마했다.
당 대표가 되면서 쇄신을 거듭했지만 친문(친문재인) 프레임에 갇혀 결국 이듬해 안 후보가 탈당하는 분당 사태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하며 작년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를 향한 '패권주의' 공세는 계속됐다.
작년 하반기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적폐청산의 최적임자로 부각되면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과의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문재인 당선인의 가족은
문재인의 가족관계는 단촐한 편이다.
그의 부모는 1950년 1·4 후퇴 때 큰 딸 재월(63·주부)만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왔다.
이후 문재인과 여동생 재성(57·주부), 재실(50·무직)과 남동생 재익(53·선장) 등 모두 5남매(2남3녀)를 뒀다.
아버지는 문재인이 군대를 제대한 직후 59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현재 부산 영도구에 살고 있다.
부인 김정숙씨는 대학 2년 후배로 대학 축제에서 처음 만났다.
문재인이 시위 도중 최루가스를 맡고 실신했을 때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게 긴긴 8년 연애 시작이었다.
김씨는 문재인이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군대에 강제징집됐을 때, 고시 공부하러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갔을 때 모두 면회를 왔다. 김씨가 군대에 있는 문 후보를 처음 면회할 때 남들 다 들고오는 통닭 대신 안개꽃을 한아름 들고온 건 유명한 일화다.
문재인은 부인 김정숙씨와의 사이에 아들 준용(30·대학강사)과 딸 다혜(28·주부) 남매를 뒀다. 처가는 서울 광장시장에서 한복집을 했다.
아들 준용은 건국대를 거쳐 미국 파슨스 디자인 앤드 테크놀로지 스쿨에서 석사를 받았다. 유튜브에 올린 석사 졸업작품으로 4개국 초청 전시회를 여는 등 유명세를 탔다.
병역은 논산훈련소 조교로 현역 복무했다. 딸 다혜는 3살짜리 딸을 둔 주부다. 남편은 회사를 다니다 미국 로스쿨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당선인 프로필
문재인(文在寅)
생년월일: 1953년 1월24일생(만 64세)

학력
1965 남항초등학교
1968 경남중학교
1971 경남고등학교
1980 경희대학교 법률학과

약력
1980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4 한국해양대 해사법학과 강사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8 한겨례신문 창간위원
1989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1995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1995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산지부, 경남지부 대표
1995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1996 부산YMCA 이사
2002 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2004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5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2006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7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8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
2009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상임이사
2010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1 혁신과통합 상임대표
2012 제19대 국회의원 국회의원
2013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5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2016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이상우 기자 jesus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