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 T.S.엘리엇 <황무지> 일부

4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경쟁하듯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개나리가 피고, 목련이 피고, 철쭉이 잔뜩 몸을 부풀리고 있고, 벚꽃이 만개했다.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생명의 환희로 온 세상이 가득하다. 그런 4월을 T.S.엘리엇은 잔인하다고 했다. 늘 궁금했다. 왜 잔인하다고 하는 걸까. 황무지, 죽은 땅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황무지에서 움트는 무언가를 보며, 차라리 잔인하게 생각된 것은 아닐까. 수백만 명이 사망한 1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T.S.엘리엇은 깊은 절망에 빠졌고, 그 절망조차 인식 못한 현대인의 황폐한 정신세계에 환멸을 느껴 이 시가 나왔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안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100년 전 T.S.엘리엇의 시구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었다. 다른 의미로 잔인한 달이 되었다.

며칠 전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았다. 304명이 한 순간 차가운 바다 속에 묻혔다. 3년만에 세월호가 떠올랐고 육상에 거치되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가 남아 있다. 어떤 방법으로도 끝내 돌아오지 못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아픈 가슴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그 아픔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아직도 진상이 100% 밝혀지지 않은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청년들의 4·19 혁명으로 희생된 영령들은 어찌할 것인가.

꽃들은 피어나는데, 산과 들, 강물 빛은 하루가 다르게 봄빛을 띄는데, 환한 꽃들에게 저절로 감탄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데, 노란 산수유나 개나리만 보아도 노란색으로 인해 온전히 꽃으로만 볼 수 없는데, 이게 잔인한 게 아니면 무엇이 잔인한 것인가. 4월을 꽃다운 4월로 기억하고, 꽃이 피고 지는 것에 경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T.S.엘리엇 시인도 <황무지> 시도 떠올리지 않고, 그저 환한 꽃을 보고 너, 참 예쁘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