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경 사회부장
▲ 이은경 사회부장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도, 무덤덤해지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통곡만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4월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꼭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 1년만 지나도 강산은 변한다고 누가 했던가. 세월호는 그때 그 아픔 그대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3년 동안 팽목항을 한결같이 지키며 가족을 그리워한 이들의 슬픔은 목포로 이어졌다.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는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을 통곡하게 만들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476명 가운데 300여명이 사망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대부분 희생됐다.
상상도 못했던 참사에 온 국민은 슬퍼했고, 또 죄인 아닌 죄인이 돼야 했다. 온 나라가 트라우마에 휩싸였다.

깊은 바닷속에 파묻혀 있던 세월호가 본격적으로 인양되던 지난달 말, 세월호는 그렇게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3주기를 기다린 것 마냥 육지로 올라왔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애를 더 태우고, 희생자 가족들은 지금이라도 참사 원인이 정확하게 드러나길 고대하고 있다. 시민들 역시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또다시 말도 안 되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세월호가 떠오르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나. 일반인 희생자를 추모하겠다며 지난해 4월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에 문을 연 추모관도 문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운영비 부족이라는 초라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고 직후 저마다 대책을 내놓으며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주장이 이어졌지만 작은 추모관 하나 운영하기가 버거워 문을 닫고 열기를 반복해야 했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운영비 지원이 어렵다는 정부는 세월호 참사 교훈을 뒤로 한 채, 경제 논리만 폈다. 세월호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심리 치료도 마찬가지다. 안산에 트라우마 센터가 설치 됐지만 유명무실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프로그램 운영으로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치료가 어렵다는 것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설명이다.

해양경찰은 또 어떠한가. 세월호 참사로 해체돼 국민안전처 산하로 전락한 해양경찰이 최근에는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구난에 상당히 취약했던 해양경찰 역할을 제대로 세우자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에 대한 장비, 훈련 등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정부 대책은 해체 뿐이었다. 해체 이후 중국어선들의 불법조업이 판을 치고, 어민들의 우려가 쏟아지며 직접 중국어선을 나포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이는 결국 서해5도특별경비단 창설에까지 이어졌다. 현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들이 앞다퉈 해양경찰 부활을 공약으로 들고 나오고 있다.

그동안 대책으로 제시됐던 모든 것들이 보여주기 식일 뿐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다른 세월호 참사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대책이었는지 의문스럽다. 1993년, 292명의 사망자를 낸 여객선 서해훼리호 침몰사고가 20년이 지나 똑 같은 이유로, 똑 같은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온나라가 떠들썩하리만큼 도하 언론이 지적했던 여객선사 부실 운영, 선박 안전성 문제 등이 지금은 과연 개선됐을까?

정부는, 또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그날을 잊어버리려 애쓰기만 한 것은 아닌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세월호는 과거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선체조사가 시작될 세월호는 과거가 아닌, 여전히 진행형이다. 세월호의 시간은 여전히 3년 전 그대로다. 어설프기만 한 정부 대책이 시간을 멈추게 만드는데 한 몫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구속된 것이 세 번째라고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과반수의 높은 지지를 받고 당선된 첫 여성 대통령이었던 만큼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와 법원의 결정에 대해 언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구속영장 청구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은 법과 원칙을 강조했다.
검찰이 그토록 내세웠던 법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아주 오래 전 원시 인류들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생존과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하나둘씩 규칙을 정했던 것이 그 기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문명의 탄생지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기원전 19세기경 인류 최초의 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됐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 한비자(韓非子)가 나라의 정치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오로지 합리적인 법에 근간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가사상을 집대성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엄격한 법치주의 정책을 편 덕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고, 그때까지 춘추·전국시대 500여년 동안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마침내 통일제국을 성립할 수 있었다.
흔히 우리는 진시황이 학자들을 땅에 파묻어 죽이고 책을 불살라 버렸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장본인이라 해 매우 포악한 황제로 알고 있지만, 당시 통일제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있었던 몇몇 사건들이 잘못 전해지고 과장돼 오해를 산 것들이 많다. 실제로 진시황의 법치주의 정책은 이후 중국 왕조시대 내내 나라 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통일제국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했던 법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한(漢)나라 전반기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법가사상의 핵심적인 이념을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고 설명했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信] 상을,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必] 벌을 준다는 뜻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상과 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이른다. 하긴 나라에서 상과 벌을 불공평하게 처리한다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종종 '法(법)'자를 '물 수(水)'자와 '갈 거(去)'자로 쪼개어 법이란 물처럼 자연스레 흘러가듯이 향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법의 이념을 설명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풀이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야만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지 않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 최초의 한자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법자의 의미를 '물과 같이 공평해야' 하고, 바르지 못한 이를 처벌해 '제거[去]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것은 물이 어떤 그릇에 담기든지 간에 언제나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물에는 평등이라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모름지기 법이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무엇보다 공평하게 시행돼야 한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다.

오늘날 법원 마당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두 눈을 안대로 가려서 최대한 공정한 판단과 처벌을 기하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서양 역시 전통적으로 법이란 '공평'과 '처벌'의 두 가지 원칙을 근간으로 해서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있지만, 법보다는 돈과 권력으로 포장된 불법을 끌어대어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들이 여전히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전임 대통령의 구속을 통해 이제 법과 원칙을 어기고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면 누구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돼 법을 농단하는 빌미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야 할 것이다.